철학을 권하다/줄스 에반스 지음ㆍ서영조 옮김/더 퀘스트 발행ㆍ380쪽ㆍ1만5000원
농부철학자 윤구병씨에게 대학교수 자리 내던지고 농사 짓는 이유를 물으면 늘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서울대 철학과 석ㆍ박사 과정에서 존재론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이것저것 할 때 '것', 이 다섯 마디로 1년 강의를 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존재' '무'라는 말을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번이라도 써본 적 있나요. 없지요. 그런데 대학에서는 '있음' '없음' '임' '아님'이 아니라 그런 말로 존재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배워 버릇하니까, 가르쳐 버릇하니까 이상한 말들만 머리에 가득하게 돼요. 그래서 아이들도 행복하지 못하고 저도 행복하지 못하고. 농사짓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 거죠."
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대학 강의실 속에 갇힌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비단 윤씨만이 아니다. 줄스 에반스도 그런 문제의식의 소유자다. 영국 옥스퍼드대 영문학과를 나왔으니 그가 일찍부터 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심각한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았고, 그 마음의 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철학, 특히 고대철학의 가르침이 현대의 인지행동치료적인 방법과 매우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가르침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병이 나았다.
이후 그는 삶과 무관한, 지나치게 제도화되었고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와 단절되어 있는 '대학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 활동을 펼치게 된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그런 삶을 위한 철학의 토론장으로 만들었고, 다양한 철학토론클럽을 주재한다. '월스트리트 저널' '더 타임스'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신문에 그 같은 주제로 칼럼도 쓰고 있고, 런던대 퀸메리 캠퍼스의 '감정의 역사 연구소'에서는 행복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첫 책 <철학을 권하다> 를 통해 철학은 잘 살아가기 위해, 또 잘 죽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철학을>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나는 그의 하루 수업(책은 오전 수업, 점심시간, 오후 수업 1ㆍ2부로 구성되어 있다)에는 고대 철학의 현인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거리의 철학'의 선구자 소크라테스,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에픽테투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실천한 디오게네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한 에피쿠로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삶이란 지지고 볶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라파엘로의 명화 '아테네 학당' 한가운데 등장하는 서양 철학의 거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삶의 의미와 좋은 삶의 방식에 대해 이들이 내놓은 처방은 저마다 다르다. 대개는 매력적이거나 유효하지만 한계도 적지 않다. 디오게네스의 견유주의는 68혁명이나 월가 점령 시위의 정신과 맞닿아 있지만 현실성을 지니기에는 너무 극단적이다. <국가> 가 대변하는 플라톤의 철학은 독단에 빠지기 쉽다. 국가>
저자가 높이 평가하는 두 철학자는 에픽테투스와 아리스토텔레스다. 특히 에픽테투스의 스토아학파는 저자가 우울증 등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된 현대의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개념을 그대로 담고 있다. 믿음을 바꿈으로써 행동을 바꿀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고대철학의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어떤 것들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감정 교육과 훈련을 통해 불행한 기억을 극복하는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인간이 의미, 숙달, 참여, 탁월성, 재미 등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아야 하고 클럽이나 협회, 네트워크, 공동체를 형성해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민주주의적 구조를 옹호했다는 점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진통을 겪고 자유민주주의의 폐해를 겪은 뒤 이 같은 믿음에 기울어 있는 사회ㆍ정치철학자(마이클 샌델)나 정치 지도자(사르코지, 캐머런)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는 정신지체장애 공동체를 운영하는 프랑스 철학자 장 바니에가 말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진정한 관계, 진정한 우정, 진정한 철학 공동체는 작고 친근한 규모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반부에서 철학을 자기계발의 효과적인 도구인 것처럼 역설하던 저자는 책이 끝날 무렵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구호를 조용히 읊조리고 있다. 철학은 병든 마음을 위한 훌륭한 처방전일 뿐 아니라 위태로운 사회를 위한 좋은 매뉴얼이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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