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에테메시 스탠더드차터드 케냐 은행장은 수도 나이로비의 이스트레이 지점을 방문했을 때 고객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아무렇게나 걸친 옷의 주머니에는 달러가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는 양말 속에서도 돈이 나왔다.
이런 '허름한 부자'들의 모습은 이스트레이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이들은 대부분 소말리아인이다. 케냐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말리아에서 1991년 내전이 발생하자 혼란을 피해 케냐에 밀려들어온 이들은 아시아인의 집단거주지였던 이스트레이를 소말리아인들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현재 약 20만명의 소말리아인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이스트레이는 '리틀 모가디슈(소말리아 수도)'로 불린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전했다.
이스트레이의 거리 풍경도 남루하긴 마찬가지다. 도로는 포장이 안 돼 여기저기 차 바퀴 자국이 나 있다.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 있는 거리에는 불룩한 자루를 맨 행상들이 돌아다닌다. 귀금속 등을 파는 '고급 가게'도 컨테이너 안에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이스트레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소말리아인들은 자신들이 피난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식이나 겉치레에는 관심이 없다.
이스트레이의 시장 규모는 막대하다. 암시장에서 하루에 유통되는 현금만 300만달러(약 34억원)로 추정된다. 소말리아에서 넘어오는 연간 송금액은 10억달러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소말리아 해적이 인질의 몸값으로 받는 연간 4억달러 가량의 돈도 대부분 이스트레이를 거친다.
이스트레이에서 이뤄지는 소말리아인들의 거래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스트레이 상인연합회의 하산 굴리드 회장은 "소말리아의 자금세탁은 대부분 여기서 이뤄진다"고 말했다. 20년 전 소말리아를 떠나 이스트레이에 정착한 압디 왈리 압둘라히도 지하 경제에서 일한다. 터키와 두바이 등에서 물건을 수입해 파는 그는 "세금이나 관세를 내지 않기 때문에 이익이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소말리아인들이 케냐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다와 육지로 연결돼 있어 왕래가 쉽고, 관광 수입으로 달러 유통량이 많은 반면 금융 투명성은 낮기 때문이다. 이스트레이가 자금세탁과 밀수로 악명 높지만 에테메시 은행장은 "이스트레이 지점에서 위조지폐가 발견된 적은 없다"며 "거친 서부시대를 연상시키는 이곳에서 강도와 사기 등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스트레이 경제가 탈법 속에서도 나름의 규율을 유지하는 것은 이슬람 특유의 송금시스템인 '하왈라'때문이다. 아랍어로 신뢰라는 뜻의 하왈라는 업자와 고객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소말리아에 있는 사람이 현지 하왈라 업자에게 돈을 맡기면 간단한 연락만으로 이스트레이에 사는 가족이 가까운 하왈라 업자를 만나 돈을 받을 수 있다. 하왈라는 수수료가 싸고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검은 경제'에 이용된다.
에테메시 은행장은 "소말리아인들의 사업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며 "악수를 하는 것이 서류에 사인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소말리아인들 사이의 악수는 '나는 당신을 믿어야 하는데 당신이 어느 부족 출신인지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속임수를 쓸 경우 나는 당신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에테메시 은행장은 "초창기 이스트레이 지점이 부진을 면치 못해 결국 소말리아인을 채용했다"고 말했다.
이스트레이에서 거래를 확장하려고 하는 금융기관은 스탠더드차터드 뿐이 아니다. 팬아프리카은행 상품연구소의 에드워드 조지 소장은 "대부분의 거래는 금융시스템 밖에서 현금으로 이뤄지지만 이스트레이에서 거래되는 금액의 규모는 은행에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말리아인들이 주도하는 이스트레이의 경제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과 같다. 에테메시 은행장은 "소말리아인들이 이스트레이에서 거래와 투자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라며 "소말리아가 안정을 찾으면 이스트레이의 돈이 급격히 모가디슈로 빠져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유엔이 주도하는 일정에 맞춰 8월20일까지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과격 이슬람주의 반군인 알샤바브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어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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