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비극은, 내겐 너무나 복잡 미묘한 삶의 많은 국면들이 타인의 삶에서는 아주 쉽고 단순해 보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삶도 사랑도 심지어 죽음도, 그것들이 대상화하는 순간 우리는 쉽사리 대담해진다. 요컨대 무례해진다. 무례는 유희와 버무려져 그 무례의 유희를 공유하는 익명의 작은 무리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비관적인,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공동체란, 집단의 결속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 특히 반성적 자아에 대한 억압의 동력 없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인류의 역사는 개인이 공동체의 장악력에 맞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제 영역을 넓혀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공간을 통해 엿보려는 죽음의 한 형식, 무연사(無緣死ㆍ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맞이하는 죽음)도 집단과 개인이 맞서는 과정에 생긴 상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의 죽음이 이를테면 고독사였다. 시신은 지난 6월 중순, 그가 숨을 놓은 지 다섯 달 가량 지나서야 발견됐다. 60년을 산 그가 생의 마지막 1년을 홀로 의지했던 공간은 서울의 오래된 재래시장 내 4평 정도 되는 다세대 원룸이었다. 가까이 유흥가나 공단, 대학이 서면 늘어난 독신 주거수요를 수용하기 위해 아예 동네 전체가 '~빌라' '~빌' '~하우스'같은 이름을 달고 급변신하면서 양산해내는 주거 공간. 동네나 증ㆍ개축 시기에 따라 유전자 조작으로 세련되게 변모한 신종 포유류 같기도 하고, 멸종을 앞둔 짐승의 윤기 잃은 거죽처럼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는. 그의 방은 그 흔한 리모델링도 해본 적 없는 듯 낡고, 이름도 없는 건물의 1층 맨 구석자리였다.
그는 재단사였다.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양복점에 취직해, 초크를 든 시간보다 잔심부름 한 시간이 더 많았겠지만, 일을 배웠다고 한다. 10년 뒤 20대 중반의 그는 어엿한 기술자였다. 당시, 그러니까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의류 봉제산업은 한국 내수ㆍ수출 시장의 주력 성장산업이었고, 재단사는 그 업종의 꽃이었다. 26살에 독립하면서 결혼을 했다. 가게는 잘 될 땐 직원 서넛씩 두고 버스 안내양 유니폼 단체주문도 받는 등 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IMF가 터졌고, 사업이 망하면서 아내도 떠났다. 이후 그는 혼자였다. 그래도 자포자기한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고, 여기저기 다니며 시다 일이라도 꾸준히 찾아 하는 눈치였고, 허름하긴 해도 지하철 2호선 역에서 걸어 7분 거리에 전세보증금 4,500만원 짜리 화장실 딸린 방도 얻었더라고, 1년에 서너 번은 연락하고 살았다는 그의 형은 말했다.
시신 곁에는 '2011년 12월 30일 새벽 5시 18분'이라 작성 시점을 적은 짤막한 유언장과 "저승 노잣돈으로 써달라"며 찾아둔 현금 238만원이 있었다. 그는 예금 4,000만원과 방 보증금을 형에게 남겼다. 그에게는 사후(死後)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전처와 장성한 딸이 있었다.
그가 살던 4층 건물 입구는 재래상가 골목의 가게와 가게 사이,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인 통로를 따라 들어가야 나타났다. 어두운 1층 복도 맨 안쪽, 상인들의 공용 화장실을 마주한 방이 그의 거처였다. 마지막 잠자리였던 반 평짜리 화장실. 거실 겸 주방 겸 침실이었을 방에는 작은 싱크대와 어른 가슴 높이의 신발장이 놓여 있었다.
한낮이었지만 어스름 저녁처럼 방은 어두웠다. 4절지 두 장 맞붙인 크기의 창이 있었지만 옆 건물 외벽과 버려진 계단 난간에 거의 맞닿아 햇볕이 스며들기 힘든 구조였다. 시신을 수습한 뒤 도배를 새로 했댔지만 역한 냄새는 남아 있었다. 열흘 넘게 열어뒀을 그 창문으로는 바람조차 나들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중고 냉장고는 있었지만 밥솥은 없었고, 프라이드 치킨 두 조각이 방 한 켠에서 썩고 있더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그 세간이니 면적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생을 맺은 프랑스 남부 마르텡 숲 속의 오두막도 4평이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육신과 영혼의 거처였던 월든 호숫가 오두막도 4평 남짓이었다. 구조 탓일까, 선입견 탓일까. 그의 공간은 폐쇄적이고 불친절해 보였다. 고집과는 다른, 표정도 개성도 없는 냉담함이었다.
그는 그 공간과 어떻게 교감 했을까. 유서에 남긴 저 형이상학적 그리움의 흔적들이, 어쩌면 심리학에서 인간의 두 가지 내재 충동이라 명명한 것 중 하나인 초월 충동의 한 극단 같았다. 나머지 하나는 안주(安住) 충동이던가.
"이 지구와 연을 맺고 내 할 일 다 한 듯하여 이제 구름이 되어 볼까, 바람을 타볼까.(…) 우주 속의 티끌 (…) 아주 많이 생각했다 (…) 그냥 무한 속으로 가보련다. 떠난 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 더 잘해주지 못해 안타깝다.(…)"(유서의 일부)
60대 중반의 형은 인터뷰 중간중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하다가도, 자책과 부채의식에 짓눌린 듯, 말문을 닫곤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동생이 남긴 유서의 유장함을 해명했다. "학벌은 없어도 동생이 독학을 했어요. 직원들한테 꿀리기 싫다면서 영어와 한자도 익히고 책도 꽤 봤나 보더라고요." 그가 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 1월, 설 전이었다고 한다. "영등포시장에서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셨어요. 뭐 특별한 얘긴 없었고…, '식구랑 연락 하냐'고 물었더니 '수신거부 해뒀던데 전화하면 뭐하냐'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더군요. 뭐 그런 얘기였어요. 그런데 그 때 이미 유서를 써둔 거였어."형과의 저 만남이 확인된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건물 외벽에 붙은 그의 방 가스 계량기에는 5월 16일자 공급 중단 통보와 함께 노란색'사용금지' 표찰이 붙어 있었다. 형은 낯선 기자에게 동생에 대해, 동생이 대면했을 세상의 불친절과 매정한 인연에 대해 아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 했다.
방문을 열고 스무 걸음 정도만 나가면 꽤 큰 재래시장 한 복판. 새벽 5시면 문을 여는 떡집이 있고 김밥 집이 있고, 자정 너머까지 영업하는 횟집도 지척이었다. 그가 이따금 들렀을 통닭집 주인 아주머니는 무슨 말끝인지 느닷없이 웃으며 손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웃음 머금은 얼굴로 생 닭을 툭툭 잘라내고 있었다. 그가 유서의 문구를 다듬던 시간에도, 며칠인지 모를 유예의 시간에도, 또 그 이후로도, 그가 택했을 자신의 동네 풍경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 조서와 형이 전한 몇 마디 말로 그의 삶이 연역될 수 없듯이, 그가 남긴 짤막한 유서만으로 죽음의 맥락이 해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택한 낯설고 격한 이별의 형식이 우리를 적막하고 스산하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출간된 일본 NHK 취재팀의 책 (용오름 발행)는 이미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는 일본의 무연사 사례들을 소개하며 그 '딱한' 현실에 대한 사회적 환기와 제도적 대책을 촉구한다. 취재팀은 "이 같은 흐름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문제제기만 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무언가 해결 가능성을 모색해가려 한다"고 적었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무기질적인 '무연사회'가 되는 것을 막는"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세상이 바뀌면서 공간이 바뀌고 삶의 양식이 달라져 왔듯이, 죽음의 형식 또한 달라져왔고 달라져갈 것이라는 현실을, 우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종교학자 시마다 히로시는 지난 해 출간된 책 에서 죽음의 종교ㆍ문화사적 의미를 분석한 뒤 "모든 죽음은 본질적으로 무연사"라며 "(그 현상을) 막으려는 노력보다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살피고 그 현상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고 조언했다. 그는 무연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부각될 경우 자칫 지난 유연사회(농경공동체사회)의 부정적인 면들, 예컨대 가부장적 권위나 전통의 억압 등이 이상화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의 고독한 주검은, 뉘앙스로 엇갈리는 저 두 갈래의 시선 앞에,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판단과 선택은, 원칙적으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죽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언제나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의 추리 작가 콜린 덱스트의 말처럼, 우리는 누구나 매일 24시간씩 저마다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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