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백성들뿐 아니라 조정의 권신 아래서 손발 노릇을 하는 하급 관리들과 뜻있는 양반들까지 합세하여 몇 차례에 걸쳐서 변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세상의 열망이 차올라 터질 때까지 바닥부터 다지며 세월을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이신통과 서일수는 함께 차탄하기를, '천지개벽'이란 그야말로 얼마나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더냐! 했다는 것이었다.
책의 인쇄가 모두 완료된 것은 오월 하순경이었다. 서일수는 전옥서에 갇혀 있는 박도희를 면회하고 일의 경과를 알려주면서 책을 어찌할 것인지 논의했다. 우선 애오개의 경주인과 논의하되 『경』과 『가사』 각각 이백 부는 한양에 남겨두고 근기(近畿) 지방과 해서(海西) 지방에 전파하고, 나머지는 단양에 옮겨두었다가 각 지방의 도인 조직에 붙여 퍼트리는 것이 가하다고 의논이 끝났다. 이신통과 서일수는 방각소에서 책들을 나를 적에 고리 부담에 나누어 몇 차례를 왕복하였다.
서일수는 이미 십여 년을 겪은 세월이었건만, 이신통에게는 이제 막 시골집을 떠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리는 세상을 만나게 되었으니 옛말에 갑자기 철든다는 소리가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유월 초닷새인가 무더운 날 저물녘에 서일수와 이신통은 여느 때처럼 내외주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침나절에 가면 수직에 나갔던 군교와 별장 등이 문간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모여 앉아 밥을 먹었고, 저녁참에는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거나 있다 해도 두셋이 조촐한 술상에 안주 한 접시 놓고 앉아 있고는 하였다. 그날따라 칠팔 명의 군인이 작은 통영반 둘을 겹쳐놓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 건성으로 평안들 하쇼? 인사를 건네면서 대문 좌우에 붙은 문간방의 왼편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인사를 던졌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신통이 뒤처져서 발이 늘어진 안마당 쪽을 기웃거리며 외쳤다.
이리 오너라.
곧 기척이 들리더니 늙수그레한 하녀가 고개를 내밀고 내다보고는 얼른 사라졌다. 그들이 잠시 앉아서 기다리는데 어느새 차린 밥상을 발아래 내려놓고 다시 사라진다. 신통이 밥상을 들여다놓고 국을 한 숟갈 떠 마시고 밥주발 뚜껑을 여는데, 서일수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어째…… 저 사람들 초상이라두 났나? 찍짹 소리가 없네그려.
신통이 힐끗 건너다보니 정말 모두가 소리 없이 술만 벌컥대며 마시고 있는 꼴이 침통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다. 밥을 다 먹고는 이신통이 다시 밥상을 들어다 안마당 켠으로 내려놓고는 이리 오너라, 한소리 해주고 건너편 문간방을 기웃하여 넘겨다보았다. 맨 안쪽 구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움츠린 채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듯한 군인은 다름 아닌 김만복이었다.
어라, 만복이 형님 오셨네.
이신통이 얼결에 큰소리로 외치자 서일수도 다가와서 방 안을 넘겨다보았다. 김만복은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고개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좌중의 군인들 중에 그들과 안면이 있던 자도 있어서 만복을 흔들어 깨우는 시늉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모로 쓰러져버렸다. 서일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 사람 참, 웬 술을 그리 많이 드셨는고?
군인들 중에 하나가 불콰한 얼굴을 들어 두 사람을 살피더니 한마디했다.
오늘 우리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그러니 양해하시오.
아니, 예서 집도 먼데 아무래두 안 되겠군. 우리가 데리구 가야겠소.
군인들이 서로 돌아보는데 별다른 의견은 없고 말을 건넨 자가 다시 대답을 한다.
평소에 잘 아는 분들 같으니 저희야 그래 주시면 마음이 놓이지요.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 김만복을 좌우에서 부축하여 거의 떠메다시피 하여 나왔다. 두 사람이 만복을 데리고 구리개 약전 뒷길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다리쉬임을 해가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를 방에 눕히니 사내자식이 오죽했으면 키득키득하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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