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 타고 강릉 방향으로 가다 보면 둔내터널 지나서부터 대관령터널 들어가기 전까지가 다 평창 땅이다. 넓다. 나들목이 다섯 개다. 관광지도 많다. 리조트, 계곡, 목장, 사찰, 캠핑장, 체험장, 펜션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고속도로 벗어나는 곳마다 한 다발씩 마주친다. 자연에 묻히고 싶어 떠난 여행에서 버거울 수 있는 그런 이정표들은, 길이 평창읍을 지나 남쪽을 향해 가팔라지면서 차차 사라진다. 목적지는 미탄면 마하리(어름치마을). 가까워질수록 오지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풍겨난다. 산빛은 어둑할 만큼 짙푸르고 들엔 온통 하얀 감자꽃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길은 사행(蛇行)하는 동강과 만나자 뚝 끊겨 버린다. 직선 거리로 십 리도 안 되는 옆 동네에 가려 해도,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차로 한 시간 넘게 산을 돌아야 한다. 그게 마음에 든다. 숨바꼭질하듯 숨은 이 마을에 도착하면, 청정한 강원도의 자연에 푹 파묻힌 상쾌함에 활짝 기지개를 켜게 된다. 거기 여름 레포츠의 세상이 있다.
투명한 물살, 짜릿한 래프팅
어름치마을이라는 명칭은 천연기념물 제259호인 민물고기 이름에서 따왔다. 고유어종으로 한강, 금강, 임진강에 사는 어름치는 환경 변화에 민감해 물이 깨끗한 하천의 중상류에서만 서식한다. 마을은 오대산에서 발원해 정선, 평창 지나 영월로 흘러드는 동강의 딱 중간에 있다. 물이 맑고 여울이 많아 어름치가 살기 좋다. 몇 개의 자연부락을 묶은 마하리(행정동 명칭)가 이 예쁜 물고기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 전엔 두루니마을, 진여울마을 등으로 불렸다. 큰 강이 마을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긴 여울 옆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들이다. 예부터 물살이 마을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셈이다.
댐과 보로 강을 막기 전 떼꾼들의 길이었던 물살은 이제 래프팅 코스가 됐다. 출발점은 문희마을 절매나루다. 래프팅객들이 찾아오기 전엔 오지 중에 오지였던 곳이다. 마을을 지키던 개 이름(문희)을 그대로 동네 이름으로 삼았을 만큼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녹음으로 뒤덮인 절벽이 감싼 동강 가운데 떠 있는 기분은 체험해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잔잔한 물결과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여울이 반복된다. 물이 맑아 강바닥이 보이지만 깊은 곳은 수심이 5m에 이른다. 바위 틈에 갇힌 고무보트를 꺼내려 엉덩이를 뒤뚱거리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우습지만, 직접 해보면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질 만큼 짜릿하다.
문희마을에서 출발해 진탄나루에 닿는 5㎞ 절매 코스(1시간 30분 소요)부터, 정선 덕수취수장~섭세강변의 25㎞ 백운산 코스(8시간)까지 여러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동강 물굽이를 보면서 걷는 칠족령
칠족령은 문희마을과 제장마을을 잇는 고갯길이다. 칠족(漆足)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옛날 게장마을(제장마을의 옛 이름)에 살던 선비가 가구에 칠하려 옻을 끓이고 있는데 기르던 개가 도망간 것을 알게 됐다. 선비는 옻나무 진이 묻은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다. 동강이 굽이치는 이곳의 풍경을 보고 감탄한 그는 '옻칠한 개발자국을 따라가다 발견한 길'이라는 뜻에서 칠족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칠족령엔 지금도 옻나무가 많고, 이곳에서 굽어보는 동강의 물굽이는 누구나 감탄할 만큼 수려하다. 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트레커들로 칠족령은 한여름에도 울긋불긋하다.
문희마을에서 백운산(882.5m) 등산로를 오르다가 경사가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걸으면 칠족령 전망대에 닿을 수 있다. 입구의 백룡동굴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거리는 약 1.7㎞. 초입만 약간 가팔랐고 나머지 구간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겨울이 추운 곳인데도 활엽수가 많다. 곳곳에 솟는다는 용천수 덕인지 궁금했다. 길은 굴참나무와 신갈나무 그늘 속으로 좁고 길게 열려 있었다. 전망대에 서니 앞뒤로 뼝대(바위 낭떠러지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에 막혀 유턴하듯 꺾어지는 동강이 몸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자 이대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 흐름이 동강의 흐름에 맞춰 속도를 늦추는 듯했다.
세상의 번뇌를 떠난 듯한 풍경. 하지만 10여년 전 동강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곳은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었다. 강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고요했다. 칠족령을 넘는 이 길은 그래서, 인간의 우매함과 조급함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길이다.
5억년 저편의 시간이 숨쉬는 동굴
"자, 탄광에서 일 좀 해보셨다는 분도 저 따라 헬멧을 쓰세요."
가이드의 말대로 했다. 아랫도리와 윗도리가 한 덩이로 된 빨간색 작업복을 입고 장화 신고 헬멧까지 쓰자 영락없는 탄부의 모습이다. 문희마을에서는 이 차림으로만 할 수 있는 레포츠가 있다. 2010년 개방된 백룡동굴 탐험이다. 마을에서 동굴까지는 1㎞가 조금 안 되는데 반은 걷고 반은 배를 타야 한다. 염천에 땀이 비질비질 뎬? 하지만 동굴로 들어서자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1979년 처음 발견된 동굴은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천연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동굴을 둘러보려면 때로 바닥을 기어야 한다. 그 불편함이 백룡동굴 탐험의 진짜 매력. 낮은 포복으로 구멍을 통과해 고개를 든 순간 5억년 저편 지구의 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세 개의 동굴로 이뤄진 백룡동굴의 전체 길이는 1,875m다. 약 200m 지점까지는 옛날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1979년 동굴의 끝부분 조그마한 구멍에서 바람이 새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동네 청년들이 함께 구멍을 뚫어보기로 했다. 고생대의 석회동굴은 그 호기심 덕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재보니 동강 유역의 석회동굴 가운데 가장 길었다. 동굴은 A, B, C 3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현재 일반에 개방하는 것은 A구간 780m다. 제주도의 동굴에 비하면 짧지만 조명 시설도 없이 헤드랜턴에 의지해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린다. 자연의 절대 암흑 속에서 누구나 동굴 탐사 전문가가 된 듯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
탐험은 가이드를 따라서만 가능하다. 무심코 가이드라인을 넘었다가 협박에 가까운 주의를 들었다. 동굴 속에 가둬놓고 나가버릴 기세다. 그 깐깐함이 무척 기꺼웠다. 동강의 산과 물과 생명들이, 모두 이 동굴의 석회석처럼 보존될 수 있으면 그만이다.
■ 여행수첩
●영동고속도로 새말, 장평IC에서 정선 방향 국도를 타고 가다가 동강민물고기생태관 방향으로 꺾으면 어름치마을에 닿을 수 있다. 백룡동굴 입구의 문희마을에 숙박시설이 있다. 평창군 관광경제과 (033)330-2399. ●동강 래프팅은 4개 코스로 나뉜다. 카약과 카누 타기도 즐길 수 있다. 서울과 대구에서 출발하는 버스 패키지 상품도 있다. 동강레포츠 (033)333-6600. 오대천, 금당계곡, 뇌운계곡 등 평창의 다른 지역에도 래프팅 코스가 있다. ●백룡동굴은 하루 180명(1일 9회, 회당 20명)으로 관람 인원을 제한한다. 사전 예약 필수. 입장료 1만 5,000원. 백룡동굴 생태체험학습장 (033)334-7200.
평창=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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