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효는 덕산 예산 일대에 나아가 사람을 모았고 충주 보은에서도 사람을 모았다고 하는데 문경 상주를 친다고 약조한 날짜와 시각에 새재의 집결지에 갔더니 백여 인은커녕 겨우 오십여 명이 모였다대. 그의 흰소리를 듣고 넌지시 관가에 발고한 자가 있었다네. 그런 엄청난 계획을 듣고 모두 입 다물고 결의를 굳게 지킬 거라고 믿는 게 우선 어리석은 노릇이지. 관군이 약속 장소를 포위하고 있다가 일시에 병장기를 겨누며 이들을 덮쳤지. 그 아수라장에서 칠팔 명이 빠져나왔다는데 박도희는 가파른 절벽을 굴러내려 개울에 처박혔다가 몇 날 몇 밤을 숨고 걷고 하면서 거의 초죽음이 되어 진천 보적사로 나를 찾아왔지. 나는 직감으로 며칠 못 가서 임효의 행적을 더듬어 암자로 관군이 몰려들 것을 짐작하고 박 서방과 함께 봇짐을 꾸려 도망쳤네. 내가 아는 곳이라곤 절집밖에 없어서 공주 갑사로 가서 은신했고 박 서방은 형의 도움으로 예산 지척인 대흥현의 친척 집에 가서 숨어 있었다지. 임 가는 애초부터 내가 보기에도 성급하고 즉흥적이라 한번 마음먹은 제 생각에만 외곬으로 사로잡혀 있는 그런 사람이었네. 내가 천지도에 대하여 좋지 않은 견해를 갖게 된 것도 그가 내게 보여준 조급함 때문이었던 것 같어. 그러나 그 직심, 이놈의 세상! 뒤엎고야 말리라 하던 그 줄기찬 분노는 내가 지금도 가슴 서늘하게 잊지 못하고 있다네. 그는 참형을 받고 장대 끝에 그 모가지가 허공중 드높이 효수되었네. 나는 몇 달 만에 절을 나와 강원도 산간을 떠돌다가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나와 버렸지. 그게 벌써 십 년이 넘었구먼. 그간에 어떻게 호구하였냐고? 허허 이러한 난세에 밥술깨나 먹거나 양반붙이라도 되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지 아는가. 제 할아비 애비의 묘 자리를 명당에 잡겠다고 천금을 아끼지 않는단 말일세. 내가 겨울이 끝나고 아지랑이가 피기 시작하는 봄철이나 여름 폭염이 지나 선선한 바람 불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환절기가 되면 죽장망혜에 삿갓 쓰고 산을 보아준다며 한 바퀴 돈다네. 일 년에 한 두어 자리씩 얻어걸리면 한 해 농사가 되는 셈이었지. 겨울과 여름에는 한양이나 감영이 있는 도방대처에서 보내고 마음이 동하면 떠돌기를 십여 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사귀었다네. 이번에 서울에 올라온 것은 구사일생으로 모면한 박도희 형제가 여전히 천지도를 숭신하고 있으며 이번에 계룡산의 정감록을 읽는 모임에 가서 도인을 끌어모으려던 것을 알게 되었지. 다행히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고 사나흘간을 참례만 했던 모양이더군. 그래서 그 형인 박인희가 전주에 내려가 있던 나를 수소문하여 왔기에 스스로 한양에 가서 기미를 살피고 어찌되었든 그를 구명할 길을 찾으려 했던 것일세. 노자로 담뱃짐을 싣고 오긴 하였으나 내가 워낙에 재물을 티끌처럼 아는 터에 어찌된 일인지 이리저리 돈 되는 일들이 잘 보이더군. 이번 과시가 열린 것도 앞뒤 아귀가 맞는 일이오, 자네를 만난 것도 참으로 기묘한 일일세. 내 이번에 천지도를 다시 보게 되었더니, 대신사(大神師)의 행적을 읽어본즉 이것이 그저 그러루한 술사의 생각이 아닌 걸세.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 도인이 미미한 일로 잡혀 있는 와중에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고, 경주인까지 정하여 산삼과 함께 책의 인쇄를 당부하는 것은 보통의 경륜이 아니고는 도모하지 못할 일이 아닌가.
그때에 두 사람이 천지도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는지 어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신통이 서일수에게 천지도에 입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을 것만은 인지상정으로 짐작할 수는 있겠다. 서일수가 다음 교주인 신사를 만나고 천지도에 입도한 것은 그 이듬해의 일로서 당시 주요 인물들이 모두 같은 무렵에 입도하게 된다. 그러나 직전까지만 하여도 서일수의 천지도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냥 세상을 뒤집어엎는다고 백성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을 보아라. 아편전쟁 이래로 서양 세력이 벼락 맞은 쇠고기가 땅에 떨어진 듯이 저희 마음대로 이리 찢어먹고 저리 찢어먹으며 노쇠한 청(淸)나라를 우롱하고 있잖은가. 조선으로서는 바로 얼굴 앞에까지 들이닥친 왜(倭)의 세력이 큰 우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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