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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길 위의 이야기] 입만 살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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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길 위의 이야기] 입만 살았더랬다

입력
2012.07.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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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나 당연히 헤어진 사람 가운데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이가 하나 있다. 연애의 감정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예의로서다. 필시 이는 나의 잘못한 바를 짐작케 하는 문장이거늘 때는 바야흐로 2011년 봄, 두바이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에티하드 항공기 안에서 나는 10시간 가까운 장거리 비행에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영화나 한 편 볼까 하여 이어폰을 꽂은 채 채널을 돌려댔다. 별다른 기대 없이 보기 시작한 게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영화 였는데 어머 이런, 배 잡을 새도 없이 터지는 내 웃음을 어쩌면 좋아.

고요한 기내 안에 웃음 참느라 몸을 들썩이길 몇 차례, 그만 나는 옆자리에 곤히 자고 있던 한 남자의 바지 위에 레드와인을 쏟고 말았다. 어머, 미쳤나봐, 죄송해요, 내가 죽어야 돼요. 호들갑을 떨며 남자의 허벅다리를 휴지로 닦아대는데 하필 왜 흰 바지냐고요. 화를 낼 법도 한데 남자는 친절했고 수다 끝에 동향인데다 다섯 살이나 어린 걸 알고 시작된 나의 누나 노릇은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영국의 어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미안하면 책이나 한 권 보내 달라 했는데, 흔쾌히 오케이 했는데 지금껏 깜깜무소식의 나였으니 이 뻔뻔함을 어찌할꼬. 혹시라도 이거 보시면 연락주시라. 흰 바지에 묻은 얼룩 가리느라 카디건으로 묶어 입고 바이 했던 젠틀맨, 은혜 갚겠사오니.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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