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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우리의 집을 우리의 몸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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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우리의 집을 우리의 몸은 기억한다

입력
2012.07.0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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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미술 시간이면 나는 이해 할 수 없는 의문에 매번 시달렸다. 왜 빈 틈 없이 칠해야 하나, 하는 게 그 의문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꼼꼼하게 칠한 그림에 점수를 주었다. 심지어는 흰색을 가진 대상도 도화지 색깔 그대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되고, 흰색으로 빈틈없이 메워야 했다. 하늘은 하늘색으로 빈틈없이 메워야 했는데, 그게 너무 지겨웠다. 한 번은 집과 나무만 칠하고 하늘은 도화지 색 그대로 비워 두었다. 선생님은 왜 하늘은 칠하지 않았는지 물으셨고, 나는 자신 있게 흐린 하늘이거든요, 했다. 호되게 야단을 맞았고, 흐린 하늘이든 맑은 하늘이든 하늘색으로 다시 칠해야 했다. 왠지 억울했다. 왜 우리의 미술교육은 빈틈없이 칠하는 걸 그렇게 강요하는가. 이 의문은 나중에 사군자를 배우면서 더 커졌다. 뭔가? 이건. 이런 그림은 온통 빈 곳 투성이잖은가. 색이라곤 오로지 먹 하나고, 선으로 모든게 표현되는 그림이었다.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양화에서는 색이 칠해 지지 않는 빈 곳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이 세상은 신의 의지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빈 곳이 있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서양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공간의 문제가 배제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색을 빈 틈없이 칠하게 하는 교육 역시 그런 서양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아무 비판없이 따라하고 있다는 데 있다. 가르쳐 주는 선생도 그 이유를 모르고, 그리는 학생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몇 세대들은 서양이 지배한 역사를 배우고, 서양 음악을 배우고, 서양 철학을 배우며 자랐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라. 서양식 옷에, 서양의 문물을 이용하고, 서양식 집에서 산다. 불과 90년 만에 우리의 의식주와 의식과 공간은 완전히 서구화 되었다. 아마도 몇 백 년 후의 고고학자가 지금의 우리가 살았던 지층을 발견한다면 이 엄청난 변화에 주목하고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을 거라고 단정 할지도 모른다. 한 공동체의 문화가 이렇게 빠르게 다른 문화를 닮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근대화는 전통과의 끈을 놓지 않고 이루어진 반면, 한국의 근대화는 전통과 완전히 단절하고 이루어졌다. 한국의 근대화가 빠르게 서구화한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주거는 가장 빠르게 서구화 된 것 중 하나이다. 지금 20대나 30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생활을 했고, 높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쇼파에서 TV를 보며, 앉은뱅이 책상의 기억이 없는 세대들이다. 주거생활에 있어서 완전히 서구화 된 첫 세대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들 역시,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한 우리 전통주거의 기억을 앞세대들과 같이 공유하고 있다. 물론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기억한다. 쇼파에 앉아서 TV를 보는 자세는 처음에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자세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남에 따라 쇼파를 타고 흘러서 나중에는 쇼파의 받침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앉는 자세가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쇼파에 앉는 생활을 해왔음에도 좌식의 습관이 꿋꿋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의자에 앉는 자세도 그렇다. 처음에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바닥에 내리고 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 의자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서구화된 주거생활을 해 온 세대들이 이러니 그 앞 세대들은 말 할 것도 없다. 식구들끼리 있을 때는 높이가 있는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거실에 낮은 상을 편다. 식당이 거실로 옮겨 가는 것이다. 침대에서 잘 자던 사람들이 날이 더워지면 곧잘 바닥에서 자기도 한다.

간혹 기괴한 부조화를 보기도 하는데 침대 아래 까는 러그가 그것이다. 원래 러그는 난방이 되지 않는 서구식 주거에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댈 때 얼음장 처럼 차가운 바닥의 기운을 덜어보려고 생긴 궁여지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깐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장식적으로 쓰이는 예다. 이렇듯 우리의 머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도 우리의 주거양식을 기억하고 있고, 서구의 주거양식과 불화하고 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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