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밍웨이와 함께 그의 차기작에 대해 농담을 하며 낄낄댔다. 그러다 우리는 권투 글러브를 꼈고 그가 내 코를 부러뜨렸다."
우디 앨런은 1971년 발표한 단편소설집 <게팅 이븐> 에 실린 '20년대의 추억(A Twenties Memory)'에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피카소와 동시대에 살았던 화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가 1977년 발표한 단편소설 '쿠겔마스 씨의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보바리 부인> (1857) 속으로 들어가 소설 속 인물과 사랑을 나눈다. 앨런의 1985년작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미아 패로는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 영화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보바리> 게팅>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인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앞서 열거한 세 작품의 이복동생이라 할 만하다. 할리우드에서 고용 작가로 일하고 있는 길(오언 윌슨)은 앨런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 결핍된 욕망과 지속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인물.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파리에서 소설가로 사는 게 그의 꿈이지만, 사업가인 아버지의 출장을 따라 온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애덤스)에게 파리는 그저 관광지일 뿐이다.
이네즈가 친구 부부와 밤늦게까지 어울리는 사이 길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헤매다 구형 푸조 자동차를 타고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앨런 감독은 앞선 작품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논리적 설명은 생략하고 황당한 설정을 천연덕스럽게 밀어붙인다. 소설가 피츠제럴드 부부와 헤밍웨이, 작곡가 콜 포터, 화가 피카소와 달리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길은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의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영국으로 시작해 스페인, 파리, 로마로 이어지는 앨런의 유럽 시리즈 중 한 편인 '미드나잇 인 파리'는 욕구 불만인 예술가의 이상향으로 1920년대의 파리를 제시한다. "예술가의 일이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줄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는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캐시 베이츠)의 말처럼 현재의 미국에서 공허감을 느끼는 길은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파리를 찾고 1920년대로 떠난다.
파리는 이방인에게 낭만의 공간이지만 좌절한 예술가에겐 일시적인 해독제이자 항생제인 공간이다. 아드리아나와 함께 19세기 후반으로 다시 한 번 시간여행을 떠난 길은 그녀에게서 파리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시기인 벨 에포크 시대에 남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레스토랑 막심에서 만난 고갱과 드가는 르네상스 시대가 최고라고 말한다.
길은 깨닫는다. 현재란 늘 불만스러운 것이기에 늘 다른 시대를 동경하게 될 것이라고. 아드리아나에게도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란 환상을 버리라"고 설득한다. 두 시대로의 시간여행은 길에게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백일몽이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우디 앨런은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우아한 화술로 판타지를 풀어낸다. 길이 젊은 시절의 루이스 브뉴엘 감독에게 40년 후 만들게 될 '절멸의 천사'의 소재를 미리 귀띔해주는 장면은 앨런의 유머 감각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옷차림새와 말투가 영락없이 우디 앨런을 빼닮은 오언 윌슨의 연기도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파리 자체다. "모든 거리가 각각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길의 말처럼 영화를 보면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 테니까. 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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