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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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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67)

입력
2012.07.0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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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상투에 탕건을 두른 사십 대의 남자가 일손을 멈췄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조각칼을 쥔 채로 일어섰다.

무슨 책이오?

하나는 수양도서며 또 하나는 노래 가사집이라오.

원본을 가져오셨나요?

약계가 이루어지면 가져오리다.

몇 부나 찍으렵니까?

각각 천 부씩이오.

방각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종이는 그쪽에서 대시렵니까?

어떤 종이를 쓰는 게 좋겠소?

그야 보통은 백지, 창지를 쓰구요. 장지가 제일 좋지요. 족보나 가내 문집을 장지로 찍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일수가 말했다.

그럼 종이는 우리 쪽에서 대리다. 헌데 이 집 주인이신가요?

예. 보잘것없습니다만. 원본을 가져오셔야 경비를 산정할 수가 있겠군요.

하더니 주인 방각수는 책 한 권을 내밀어 보였는데 ‘고금소총(古今笑叢)’이라고 겉장에 찍혀 있었다.

이거 저희 집에서 찍었습니다만, 이 정도의 책이라면 저희 품삯만 사십 냥이 나오겠습니다. 두 가지라니 도합 팔십 냥입니다. 물론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처럼 그림이 들어간다면 공임도 더 올라가겠습죠.

허어, 품삯이 만만치 않구려. 그림은 없겠으니 염려 마오.

활자판을 짜고 장마다 찍어내어 제책까지 하는 일이라 여간 번거롭지 않습니다.

그날로 두 사람은 누렁다리 지전에 들러 종이를 사고 책의 원본과 함께 방각소에 갖다 주고 약계를 하였다. 서일수는 주인에게 약조금으로 사십 냥을 내어주며 은근히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 계원들끼리만 나누어 읽을 책이라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게 단속을 좀 해주어야겠소. 이달 안으로 모두 끝내주면 팔십 냥 외에 이십 냥을 수고비로 더 쳐드리리다.

주인은 서울 사람이라 이내 알아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만……

몇 장을 들춰 본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용이 난삽하면 좀더 쓰셔야 할 겁니다.

그야 인쇄만 차질 없이 해준다면 어찌 인정전이 없겠소? 그리고 저와 이 사람이 번갈아 드나들 터인즉 괜찮겠지요?

그러문입쇼, 물주이신데 오셔서 좀 도와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서일수는 전옥서에 박도희의 면회도 다니고 이신통은 전기수질도 했지만, 오전에는 명례방의 밥 붙여먹는 내외주점으로 가서 느지막이 아침을 얻어먹고는 곧장 방각소에서 책 찍는 일을 지켜보았다. 절이나 민간에서는 분량이 적은 책은 매 장을 일일이 나무판에 새로 새겨서 찍기도 하는데, 금속 활자의 작업을 본받아 목각 활자로 인판을 조립하여 찍는 것이 시간과 공력을 줄이는 일이 되었다. 목각의 높이와 같은 테두리를 친 사각형의 틀에 문장의 줄에 맞추어 칸막이 계선을 끼워놓고 수장인 주인이 책의 본문을 불러주면 수하 방각수가 활자를 찾아내어 벌여놓았다. 일수와 신통이 방문했을 때, 대개는 그들이 원문을 읽어주었다. 골라놓은 활자가 한 장 분량이 되면 그것들을 틀에 맞추어 넣었다. 활자 배열이 끝나면 헐거운 곳은 대나무 조각을 끼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려서 수평이 되게 하고 다지개로 단단히 다졌다. 먹솔로 먹을 찍어 활자 면에 골고루 칠하고, 인쇄할 종이에 말총에 밀랍을 묻혀 골고루 문질러준다. 초벌을 인쇄하고 본문과 대조하여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는 천 장의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었다. 『천지도경』은 한문이었고 『천지인가』는 우리 글 가사이고 길이도 짧아서 그냥 목판에 붓으로 써서 조각도로 양각을 새기도록 하였다. 먼저 경을 찍어내는 동안에 가사의 목판을 새겨나갔다.

그 무렵에 이신통은 다시 구리개의 약방과 배오개의 연초전으로 번갈아 찾아가 이틀에 한 번씩 소설책을 읽었고, 김만복의 충고에 따라 상순에는 종각 앞에서부터 흥인문 안 첫다리까지 오르내리다가 하순이 되면 장악원, 혜민서 등이 있는 태평방의 천변과 소설 책전이 많은 광통교 남측 등으로 옮겨 다니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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