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 세기째 논쟁 중인 건강보험 못지않게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다른 현안이 있다. 좀 엉뚱해 보이지만 유엔 해양법 협약 가입 문제는 벌써 30년째 논쟁 중이다. 1982년 체결돼 94년 발효된 이 유엔 해양법에 중국과 미국 우방국 대다수를 포함, 162개국이 가입해 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운데 유일한 미가입국이다. 미 정부는 최근 해양법 문제를 다시 꺼냈는데 이는 미국의 아시아 복귀 전략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5월 말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 증인석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이 나란히 앉았다. 외교와 국방의 수장들이 한 자리에서 해양법 가입의 필요성을 의원들에게 설득하는 모습은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연안에서 200해리까지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인정, 대륙붕 개발, 북극해 자원 확보와 같은,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경제 논리를 펴며 해양법 가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3인의 속 마음이 드러난 것은 청문회 말미 클린턴 장관에 의해서였다. 클린턴 장관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주장이 해양법 수위를 넘고 있는데 미국은 우방국을 지지하는데 입지가 약하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중국이 미국보다 해양 분쟁에서 법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결국 국제무대에서 빈 손으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없으니 '무기'를 달라는 게 이들의 요청이었던 셈이다.
해양법 가입에 반대하는 진영의 입장은 해군 작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세계 최강 해양국가의 중추인 해군력과 자위권을 포함, 주권을 약화시키는 권한을 넘길 수 없다는 논리가 그 동안 굳어졌다. 유엔 예산의 22%를 대면서 해양법 회원국인 쿠바와 동일한 크기의 목소리밖에 내지 못한다는 현실도 반대의 정서를 형성했다. 지난달 14일 상원 외교위에 출석한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은 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해양법이) 전세계 자산을 재분배하려는 인류 역사 최대의 기구를 창설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한 사실을 거론했다.
그러나 클린턴 장관의 우려는 최근 중국과 베트남의 분쟁을 구경할 수밖에 없던 미국의 궁색한 처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달 말 베트남이 시사ㆍ난사군도 해역을 주권 관할 범위로 정한 법을 마련하자 중국은 즉각 싼사시를 별도 설립해 영유권 분쟁지역을 통합 관할토록 했다. 하지만 중국과 베트남의 갈등 과정에서 미국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앤드루 샤피로 국무부 차관보가 분쟁 해결 기준으로 정작 미국이 부인해온 해양법을 슬쩍 언급한 것은 공허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남중국해 분쟁 사안에 개입할 명분이 약한 미국은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방부는 별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해양법 가입을 최우선 현안으로 홍보하고 있고 해군과 태평양사령부는 미국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보호ㆍ증진시킨다며 보수 진영의 해군 약화 논리를 반박한다. 국무부도 헨리 키신저 등 생존한 전직 국무장관들로부터 "이 법의 비준을 통해 미국은 해양 경계를 확장하려는 국가들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찬성 의견을 끌어냈다.
이런 움직임으로 볼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조만간 해양법 가입을 강행해 30년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가입하면 해양법은 말 그대로 세계 해양을 규율하는 최고의 법 체계가 된다. 여기서 살펴야 할 것은 미국의 해양법 가입 문제가 한국의 이해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이어도가 한국과 중국의 EEZ가 겹치는 범위에 들어있듯, 한반도 주변국과 관할수역 경계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북한도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가 언급될 때면 해양법에 어긋나는 유령 경계선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한반도 주변 해양이 덩달아 뜨거워지기 직전이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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