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서명하지 않으면 국제적인 개망신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29일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오후 4시로 예정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서명을 불과 1시간 30분 가량 남겨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망신을 감수하며 여야 정치권과 비판적인 국민 여론의 요구에 뒤늦게 굴복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여당 압력에 고개 숙인 외교장관
신각수 주일대사가 이날 오후 4시쯤 일본 외무성에서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외교부는 이날 오전 8시 보도자료를 내고 협정 서명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오전 11시30분에는 협정 전문을 기자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간, 새누리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김을동 의원 등 상당수 참석자들이 "국민 여론이 너무 좋지 않다, 정부가 당을 무시한 처사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이에 이한구 원내대표가 사태 파악을 지시하자 당 정책위부의장인 정문헌 의원과 당 수석전문위원은 외교부 관계자들과의 전화통화를 거쳐 협정 체결의 문제점을 상세히 보고했다. 새누리당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지켜본 김 장관은 청와대 관계자들과 수시로 통화하며 대책을 숙의하기도 했다.
오후 2시, 이 원내대표는 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부가 절차를 어겼고 여론 수렴도 안됐다. 국회의원들이 벼르고 있다"며 협정 체결을 보류하도록 촉구했다. 이에 김 장관은 "당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 논의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이 원내대표는 청와대 관계자에게도 전화를 해서 비슷한 취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전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총리실을 찾아와 거세게 항의할 때까지만 해도 꿈쩍하지 않던 외교부는 전례 없는 여당 원내대표의 압력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새누리당은 여당으로서 체면 치레를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27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한일 정보보호협정은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긍정 평가한 뒤 보류를 요청한 데 대해 일각에서는"여당이 오락가락했다"는 비판론도 제기됐다. 민주통합당이 이날 오전 "21세기 3 ∙1운동이 일어날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비난한 것이 여당을 긴장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여야의 강경한 분위기를 의식한 정부는 이날 오후 2시50분쯤 신각수 대사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 협정 서명 연기를 통보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정부 독단으로 협정 추진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17일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를 만나 "한일간 군사협정을 졸속으로 처리하지 않고 앞으로 국회 차원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성환 외교부 장관도 "한일 정보보호협정에 대한 정치권의 문제 제기가 있어서 체결 시점을 감안하겠다"며 정치권과의 협의를 약속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이보다 사흘 앞선 지난 달 14일 법제처에 한일 정보보호협정의 국회 동의가 필요한지에 대해 법령심사를 의뢰했다. 일본과 체결할 협정안을 이미 완성해 법제처에 제출해 놓고 정부가 단독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한 상태에서 여론의 반발을 감안해 구색 맞추기로 국회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법제처는 한달여 후인 이달 22일 "국회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협정"이라고 외교부에 통보했다.
일사천리로 국무회의 통과
정부는 26일 국무회의에서 협정 체결안을 '즉석 안건'에 포함해 비공개로 의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라는 부정적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국방부가 아닌 외교부가 안건을 상정하는 꼼수도 부렸다. 중남미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은 28일 협정안을 재가했고, 외교부는 같은 날 "국민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지만 서명은 예정대로 한다"며 협정 체결 고수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29일 협정 서명이 보류되자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유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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