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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학살, 그 이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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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학살, 그 이후' 베트남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인류학

입력
2012.06.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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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그 이후/권헌익 지음ㆍ유강은 옮김/아카이브 발행ㆍ327쪽ㆍ1만5000원

전쟁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내년이면 종전 60주년인 한국전쟁의 기억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고통과 갈등의 뿌리다.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다. 특히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한국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미군과 함께 한국군이 주요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37년 전인 1975년 끝났고,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지도 올해로 20년이 됐다. 분노와 증오를 넘어 용서와 화해를 말하게 된 지금도, 우리가 그들에게 갚아야 할 역사의 빚은 아직 남아 있다.

인류학자 권헌익(50ㆍ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교수 겸 선임연구원)이 쓴 <학살, 그 이후> 는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마을공동체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밝힌 연구서다. 1968년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베트남 중부의 두 마을, 하미와 미라이를 장기간 현지 조사해서 쓴 이 책으로 저자는 2007년 '인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클리포드 기어츠 상'을 받았다. 영어 원서 는 2006년 캘리포니아대 출판부에서 나왔다.

'하미와 미라이에서의 추모와 위로'(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원통하게 죽은 자에 대한 해원(解冤)의 이야기다. 그들을 추모하고 위로함으로써 마을공동체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파괴된 삶을 회복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감동적으로 전한다. 이론적 설명이 다소 딱딱하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낭 남쪽 해안의 작은 마을인 하미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 해병대가 저질렀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부터 임신부까지 마을 주민의 80%인 135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희생자 중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청년은 3명밖에 안됐다. 미라이에서는 바커기동부대 소속 3개 소대가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했다.

수백 구 시신이 뒤엉켜 신원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 희생자들은 30여 년이 지나서야 마을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쉴 자리를 찾았다. 전후 베트남 정부는 영웅적인 전사자들을 대대적으로 기리고 찬양했지만, 평범하기만 한 민간인 희생자들은 오히려 주변부로 밀려났다. 비참한 죽음은 혁명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민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됐기 때문에 전통 관습에 따라 그들을 추모하는 행위조차 미신으로 비난을 받았다.

국가의 공식 기념 체계에서 배제된 이 초라한 죽음들이 산 자들의 삶 속으로 돌아온 것은, 전후 한 세대가 지난 1990년대부터다. 1980년대 말부터 베트남의 경제ㆍ정치 개혁이 시작되면서 국가 통제가 느슨해지자 망자를 추모하는 베트남의 전통문화가 되살아난 것이다. 하미와 미라이 사람들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이장하고 무덤을 단장하고 그들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주민들은 가족이나 친척, 자기 마을 사람이 아닌 떠도는 영혼까지 받아들였다. 가해자인 미군이나 한국군 병사의 영혼에게도 꽃과 음식을 올려 위로했다. 이 편과 저 편을 가르지 않고 불쌍한 죽음들을 두루 껴안음으로써 마을공동체가 화해와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저자는 베트남 가정의 망자 추모 의례에 주목해 그 과정을 파악했다. 조상 숭배 전통이 강한 베트남에서 사람들은 집안 사당에 조상을 모시고, 마당 가장자리에는 잡신을 위한 사당을 따로 둔다. 그러나 학살 희생자들은 들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조상 사당에 모시기엔 너무 부자연스런 죽음이고, 객사로 볼 수 없으니 떠도는 혼령을 위한 잡신 사당에도 맞지 않았지만, 마을공동체는 적당한 해원 의식을 거쳐 이들을 사당에 불러들였다. 전쟁 당시 적이었던 혼령도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위로했다. 이러한 현상은 민간 전통문화가 지닌 융통성과 포용력을 보여준다.

'원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결론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중략) 집단 사망의 희생자들에게 원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양극적 정치와 상징적 정복의 정치를 초월하는 방법이다. 다만 양극적 정치에서 부정된 인류의 화합과, 공동체 화합의 상징적 형태에 감춰진 보편적 규범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책은 주로 국가체제나 국제관계 같은 큰 틀에서 연구해 온 전쟁을, 마을공동체와 가족이라는 일상의 작은 세계로 옮겨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저자는 "전쟁 연구에서 이러한 접근법은 세계 학계에서도 등장한 지 10~15년밖에 안 된 최신 경향"이라고 소개하면서 "큰 세계와 작은 세계를 결합해 깊이 들어가면서 동시에 넓은 지평으로 나가는 작업이라야 전쟁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끄는 국제연구사업단 '한국전쟁을 넘어서'가 주관해 최근 연세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는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틀로 큰 세계와 작은 세계의 결합을 시도했다. 공동체의 기억을 포함한 문화사회사와 국제관계 양쪽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함으로써 '한국'과 '전쟁'을 넘어 한국전쟁 연구의 새 지평을 모색한 자리였다.

저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류학자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으로 기어츠 상을,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이론적으로 분석한 <베트남전쟁의 혼령들> 로 조지 카힌 상을 받음으로써 인류학 최고의 영예를 모두 차지했다. 그가 재직하는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는 노벨상 수상자만 32명을 배출한 곳으로, 케임브리지의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힌다. 그는 이 곳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다. 이번 책을 시작으로 영어로 쓴 그의 책 3권, <베트남전의 혼령들> <또 다른 냉전> <북한_카리스마 정치를 넘어서> 가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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