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장관 자격 없는 장관들

입력
2012.06.29 12:06
0 0

테이블은 타원형으로 바뀌고 5m나 되던 테이블 간격은 3.5m로 줄었다. 한쪽엔 커피와 잔이 놓인 탁자가 배치됐다. 2008년 3월 4일 현 정부 첫 국무회의가 열린 청와대 세종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보고와 지시가 이뤄지는 천편일률적 회의보다 토론이 우선되는 실질적 회의가 되게 하자며 밤샘 토론까지 제안했다. 소통의 의욕이 넘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내세운 '창조적 실용주의'는 내각에 잘 스며들지 않았다. 국무회의가 처음 토론식으로 진행된 것은 5개월 뒤인 8월 5일.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장관들이 대통령 앞에서 타 부처 정책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어색해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런 회의가 반복되면 열띤 토론문화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4년이 지난 지금 국무회의 분위기는 어떨까. 청와대 참모의 기대와 예상대로 의견과 주장, 반박과 재반박이 오가고 중재ㆍ타협안이 마련돼야 할 정도로 열띤 토론이 이뤄지고 있을까.

매주 국무회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니 그렇다, 아니다 단정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밀실 의결 사태는 국무회의가 4년 전 이 대통령의 언급과 달리 소통은커녕 매우 경직되고 형식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4년 간 국무회의에서 각료들의 의견 개진과 토론이 늘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면 그토록 민감한 사안을 비공개로 은근슬쩍 의결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국무회의 참석 각료들이 협정 체결 안건 의결과정에서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안건은 통상 절차와 달리 회의 당일 '즉석 안건'으로 상정됐다. 일국의 장관이라면 국방부와 외교통상부가 왜 갑작스럽게 서둘러 협정을 체결하려는지, 24개국과 맺은 기존 군사정보협정들과 달리 국방부 대신 외교부가 안건을 상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어야 했다. 협정이 정말 우리 국익에 큰 도움이 될 만큼 실효성이 있는지도 따졌어야 했다. 일본의 무성의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풀린 게 없는 상황에서 국민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우리가 먼저 일본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문제 의식도 드러내지 않았다. 장관들이 문제투성이인 비공개 밀실 처리가 몰고 올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면서도 우려나 반대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그러고도 일국의 장관이라고 배지를 달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장관들은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이 '대통령의 뜻'임을 알았을 것이다. 국방부나 외교부가 이 대통령이 재가한 사안임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누가 이 대통령의 뜻에 토를 달수 있겠나'라고 장관들은 억울해 할지 모른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각료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침묵했다 해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각료들은 지난해 6월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아무런 의견 개진 없이 15분 만에 의결했다. 당시 국무회의 회의록에는 '이견 없음', 단 네 글자만 기록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고작 사흘 뒤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비난 여론에 밀려 협정 체결이 보류되고 외교적 망신만 사게 됐다. 모두 장관들의 침묵이 초래한 결과다. 자신들에게도 역사에도 작지 않은 오점이다.

근본적으로는 이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진정 장관들과 토론하고 소통하는 국무회의를 만들 의지가 있었다면, 또 그 의지를 4년 동안 제대로 실천했다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협정 체결에 이의를 제기한 장관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이유를, 국민은 물론 각료와 제대로 소통하지 않았을 때 어떤 엄중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곱씹어 보기 바란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