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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지리산이 꼭꼭 숨겨 놓은 남원 와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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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지리산이 꼭꼭 숨겨 놓은 남원 와운마을

입력
2012.06.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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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운(臥雲). 구름이 눕는다는 뜻이니 필경 구름도 넘기 힘든 심심산골이거나, 구름도 누웠다 갈 만큼 산과 물이 수려하다는 요량의 작명일 게다. 납득이 간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 숨어있는 와운마을은 깊고, 또 곱다. 뱀사골 입구 반선에서 심마니 능선 따라 반야봉 지나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을 탄 후 삼정능선으로 내리는 곳까지가 마을의 영역이다. 밭뙈기 20정보에 논이 35정보, 마을 식구는 다 해봐야 7가구에 19명이다.

작은 마을인데 역사가 깊다. 지금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북부사무소 자리에 있던 송림사가 창건될 때 마을이 함께 생겼다고 전해진다. 얼추 1,300년 전, 통일신라 때다. 그걸 곧이 믿지 않더라도 임진왜란을 피해 영광 정씨와 김녕 김씨가 이곳에 왔다는 건 기록에 남아 있으니,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마을 내력이 거슬러 오른다. 신라든 조선이든 이야기만 남았을 뿐, 지금은 숲과 계곡에 묻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차 다니는 길 말고 호랑이 다니던 옛길이 있다고 해서 마을로 전화 걸어 안내를 부탁했다. 전 이장 이완성(49)씨가 뱀사골 입구까지 내려와 길을 잡았다. 캠핑장이 만들어진 계곡의 뒤편, 우거진 잡목을 걷고 어둑한 비탈로 올라서자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길이 나타났다.

“이 길이 얼마나 예쁘고 이야기가 많은 길인데, 새 길이 났다고 이제 공단에서 못 다니게 해요. 자연보호도 중요하지만 와운마을을 제대로 알려면 이 숲길을 걸어봐야 하는 건데….”

천년숲길이라는 옛길엔 이젠 그림책에나 남았을 만한 얘기가 타래져 있다. 터벅터벅 걷다 이씨가 왼쪽 돌무지를 가리켰다. 아장이라는 곳인데 죽은 채 태어난 아기나 젖먹이 때 죽은 아이들을 항아리에 담아 묻었던 자리란다. 좀 더 가서 있는 느티나무는 왕초나무. 어깨 높이에서 옆으로 꺾어져 걸터 앉기 좋게 생겼다. 동네 아이들 중 요새 말로 하면 ‘일진’인 녀석들만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었던 나무다. 절샘 또는 참샘이라고 부르는 옹달샘은 숲길의 딱 중간 지점에 있다. 1995년 차도가 생기고 숲길에 인적이 끊기면서 물도 말라버렸다고 한다.

와운마을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멋지게 몸을 비튼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족히 삼사백 살은 먹은 듯, 도시에 있었으면 보호수로 지정됐을 법하다. 그런데 바늘잎이 모두 누렇다.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이씨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이 오며 가며 쓰다듬어주던 이 나무도 숲길이 막히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4, 5년 전부터 증세가 심해져 올해는 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생가지까지 말라버렸다고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이장 정판석(58)씨의 자랑이 걸지다. 10년 전만 해도 살림이 꽤 괜찮았다는 그는 “이 마을 땅 한 마지기를 팔면 아랫마을 땅 다섯 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리산이 오목하게 패인 곳에 편안하게 들어앉은 마을 품새를 보니 그 말이 허풍이 아닌 것 같다. 해발 800m 가까운 고지인데 아랫동네 호박잎이 다 얼어 죽는 겨울철에도 이곳 농작물은 파랗단다. 밤하늘은 온통 별밭인지 천체망원경을 갖춰 놓은 집도 있다. 세상의 소리가 끊긴 곳, 시냇물 소리가 시리도록 청량했다.

마을 뒤편 언덕엔 천년송이 서 있다. 키 큰 소나무가 두 그루인데 아래쪽 ‘할머니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424호 천년송이다. 옛날 아이를 가진 여인네들은 여기 와서 태아에게 솔바람 소리를 들려줬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나거나 장 담글 때가 되면 이 나무의 솔가지를 꺾어 금줄을 만들어 쳤고, 음력 초사흘이면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당산제를 지냈다. 나무는 일제 시대 마을이 칡껍질, 개가죽까지 공출 당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여순사건과 빨치산 토벌 땐 마을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도 지켜 봤을 것이다.

그것 말고도 짐작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이 나무는 품고 있으리라. 이제 나날이 작아져 가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천년송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남원=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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