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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작품 속을 걷다] 조은 <따뜻한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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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작품 속을 걷다] 조은 <따뜻한 흙>

입력
2012.06.2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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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직동을 걷는다. 주저앉은 묵은 기와 지붕과 바스라져 내리는 시멘트 담벼락의 골목길.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사 지내던 터, 사직단이 있는 이곳엔 늘 노인의 체취가 고여있는 것 같다. 말캉한 것, 세련된 것, 풋풋한 것의 반대 편에서 곱게 늙은 동네다. 햇볕 따가운 날 오후의 산책길, 능소화 핀 골목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살갑다. 옛날 무릎에 날 누이고 팔랑팔랑 부채질을 해주시던 할머니의 바람 같다. 그늘진 담에 기대앉아 책을 편다. . 문학과지성사에서 2003년 발간된 시집이다.

"익숙한 산책로를 걷다가/ 맥을 놓고 앉은 노인을 지나왔다/ … /언젠가는 나도 어딘가에 주저앉아/ 그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거라고/ 그때는 지금보다 마음이 더 이상할 거라고/ 생각하며 지나왔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능소화 핀 길을 어제처럼 걸었을 거다/ 수천의 꽃송이를 얹은 담장 끝에서 문득/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을 거다/ 그가 나를 반기면/ 나는 단숨에/ 그 길의 심장으로 뛰었을 거다(후략)"('언젠가는 그런 모습으로')

조은이라는 시인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몇 권의 책을 통해 그가 소금밭 같은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강단을 지닌 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는 인왕산 자락에 오래 살아서 사직동의 낡은 집과 길이 시의 배경이 되는데, 시들고 남루한 서울의 풍경은 종종 죽음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럼에도 "내가 보는 세상은 아직 싱싱하다"('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모두들 들뜨는 계절에 내면으로 침잠하는 그의 시가 떠오른 까닭이 무엇일까. 비치파라솔의 해변으로 향하는 길의 정반대 편에, 사직동의 조붓한 골목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노인들을 기웃거린다/ 사직공원에서/ … / 노인들은 살랑대는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움직임이 없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서는/ 아이들이 이마를 반짝이며/ 몸속 물을 방류하려 뛰고/ 하늘에는 비둘기들/ 발 닿았던 곳에서 껴입은 삶을/ 털며 휘청거린다/ … / 노인들 사이에 앉아본다/ (편안하다……)/ 잿빛 그루터기가 빼곡한 천수답처럼/ 말라 있는 눈들이/ 나를 돌아본다"('다정한 노인들')

여름날 동네 산책이 갖춰야 할 조건 몇 가지. 고되지 않을 것, 그늘이 깊을 것, 벽이 바람의 길을 방해하지 말 것, 시원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아담한 카페가 있을 것 등이다. 마지막 조건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직동의 풍경은 적잖이 변해 있었다. 효자, 창성, 누하, 옥인, 필운, 통의, 체부, 사직, 적선동 등 경복궁 서쪽 담장과 인왕산 사이의 오래된 마을들이 서촌(西村)이라는 테두리로 묶이면서,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힙(hip)한' 장소 중 하나로 변모 중이다. 매동초등학교 앞의 작은 카페. 콜롬비아 원두를 숯불로 볶아 손으로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흙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아직은 나의 의지로 간다/ 그림자는 나를 응시하며 짧아지고 있고/ 나무는 나를 이끌어온 하늘에/ 氷裂(빙열)을 만든다/ … / 혼잣말을 중얼대다 나 힘없이 주저앉는다/ 허물어지는 속도는 단호하다/ 나 스스럼없이 드러눕는다 금세 흙이/ 내 몸에서 곰실거리고/ 나무의 그림자가 그 위에 얹히며/ 뿌리를 향해 내 몸을 누른다(후략)"('숲의 휴식')

종로구청은 사직동과 그 언저리 서촌의 골목길을 꼬불꼬불 연결해 '오솔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0개 넘는 종로 골목길 관광코스 가운데 제2코스란다. 시멘트 담벼락에 붙은 안내지도에는 괄호하고 '도심 속 오아시스로'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반갑지만은 않다. 이런 '오아시스'를 찾는 이들은 주로 20대 여성들인데,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예스러운 동네들이 점점 카페촌으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의동, 누하동의 예쁜 한옥들은 이미 카페로 변했다. 1970년대의 분위기를 간직한 금천시장 점포들도 반쯤 새로운 간판을 내걸었다. 서촌의 끄트머리인 사직동은 막 그런 변화의 초입에 들어선 듯 보였다.

"삼 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 / 언젠가 나도 명이 다한 문고리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이다/ 나라는 문고리를 잡고 열린 세상이/ 얼마쯤은 된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기 전에도/ 누군가가 수십 년을 살았고/ 문을 새로 바꾸고도 수십 년을/ 누군가가 살았을 이 집에서/ 삭아버린 문고리/ 삭고 있는 내 몸"('문고리')

사직공원에서 종로도서관을 지나 인왕산길로 오르면 궁술을 연마하는 황학정과 단군성전이 나타난다. 서울 도심에서 만나는 이색적 공간들이다. 내처 서울성곽 있는 곳까지 올라 한국사회과학자료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사직터널 위를 지나게 된다. 나무가 우거져 낮에도 어둑한 길이다. 나무 데크 깔린 이 길이 끝나고 군데군데 뜯겨나간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다시 한번 출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여기부터 새로 닦은 경희궁길까지가 오래된 서울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네, 남루하지만 정겨운 사직동의 본면목이다.

"오래 염전을 걸어왔는지/ 바지를 둥둥 걷고/ 허리를 바짝 접고 일흔의 할아버지/ 소금 수레를 끌고 간다/ 내수동을 지나 경찰청을 돌아/ … / 짠맛으로 정제된 인간의 한 생애가/ 염천 속을 걸어간다/ 소금뻘을 한참 더 가려 하는가/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모래인가 소금인가/ 강파른 그의 어깨 위로/ 차오르는 저 빛은"('바퀴')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오면 미술관과 카페들이 모여 있는 '오솔길'이 다시 이어진다. 경희궁을 옆에 두고 키를 높이지 못한 오래된 양옥들이 모여 있는 또 다른 모습의 사직동이다. 사대문 안에도 부자들이 살던 시절 지은 양옥들은 돈으로 치장할 수 없는 여유의 결을 품고 있다. 찻집으로 바뀐 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래돼 광택이 삭은 타일이 깔려 있었다. 차가운 커피를 주문하고 시집을 덮었다. 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이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곳에서 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사직동 산책은 그렇게 끝났다. 무던히 더운 날이었다. 사직동 골목으로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 /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따뜻한 흙')

■ 여행수첩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사직공원쪽 방향,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경희궁쪽 방향 산책로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반딧불 로드'라는 표식과 함께 산책 코스를 안내한 지도가 곳곳에 붙어 있다. ●종로구가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골목해설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직동이 포함된 세종마을(서촌)을 비롯 북촌, 계동, 삼청동, 광장시장 등 10개 투어 코스가 있다. 사흘 전까지 홈페이지(tour.jongno.go.kr) 신청. (02)730-5479.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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