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에 걸쳐 아일랜드를 지배해온 영국의 상징적 존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3,400명의 희생자를 낸 북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이끈 마틴 맥기니스 전 아일랜드공화군(IRA) 사령관.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구원을 상징하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 뜻깊은 악수를 나눴다.
북아일랜드 방문중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방문 이틀째인 27일 벨파스트에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부총리인 맥기니스 전 사령관을 만났다. 둘은 악수를 나눈 뒤 여왕 부군 필립공,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 등과 함께 환담했다.
둘의 악수는 피로 얼룩졌던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과거사를 끝낸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1972년 영국의 북아일랜드 자치권 박탈로 시작된 유혈 분쟁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IRA 테러의 희생자 중엔 79년 암살된 여왕의 사촌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도 있다. 98년 평화협정으로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직접 통치 대신 자치권을 얻었고, 현재 IRA의 정치조직 신페인당이 의회 다수당으로 집권하고 있다. 맥기니스 부총리는 “여왕과 악수하면서 나는 여왕이 대변해온 수십만 명의 북아일랜드 통합주의자(영국과의 통합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평화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은 “역사적인 악수”라며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BBC방송은 “북아일랜드뿐 아니라 아일랜드에서도 세를 넓히고 싶은 신페인당이 여왕과의 만남을 통해 정치력을 과시했다”며 “영국에 대해 비타협으로 일관해온 기존 북아일랜드 정치의 종언이 확인된 순간”이라고 논평했다.
둘의 만남을 지켜본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IRA의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스테판 골트는 “맥기니스가 여왕과 악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반면 신페인당 지지 지역에는 ‘배신자’ ‘유다’ 등 그를 비난하는 낙서가 있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로빈 임스 전 아일랜드 성공회 대주교는 “테러 현장에서 본 참상을 잊을 수 없지만, 이번 악수가 북아일랜드 평화의 또다른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북아일랜드 방문은 이번이 20번째. 그동안 테러 우려로 비공개 방문해왔던 여왕은 처음으로 일정을 미리 알렸다. 여왕 부부는 26일 현지에 도착, IRA 테러의 상징적 장소인 에니스킬렌 마을을 찾아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를 위로했다. 87년 11명이 사망한 에니스킬렌 폭탄 테러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이 필요하다는 국제적 공감대를 일으켰다. 여왕 부부는 마을 성공회 성당에서 재임 60년 기념 예배를 본 뒤 가톨릭 성당을 찾아 주민들과 환담했다. 여왕이 북아일랜드에서 IRA의 종교적 기반인 구교의 성당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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