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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남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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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남과 너

입력
2012.06.2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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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고등학교를 다녀왔다. 공존을 주제로 일주일간 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였다. 과학 교과에서는 협력 수업을 통해 협동의 의미를 생각하고 국어 교과에서는 공존과 관련된 작품을 모듬 토론했다고 했다. 일주일간의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학교폭력과 왕따에 대해서 공존을 화두로 삼아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고민스러웠다. 보통 공존이라고 하면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하게 되지만 그건 너무 진부했다. 학생들이 '그건 우리도 알거든요'라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을 것이 뻔했다. 우린 몰라서 제대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더 안 움직이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에게 우리 삶에서 '너'의 의미와 중요함을 파국적 상황을 통해 이야기했다. 저 멀리서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우리는 다 죽게 되었다. 그러면 대충 3가지 정도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그래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향해 도망가다 물에 휩쓸리는 죽음이다. 다른 하나는 자포자기해서 술병 하나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가 두 팔 벌리고 덮쳐오는 파도를 맞이하는 죽음이다. 마지막은 그 순간에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그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맞이하는 죽음이다. 어떻게 죽고 싶냐? 학생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당연히 3번이라고 말했다.

왜 우리에게 '너'가 중요한지를 들려줬다. 죽음의 순간에 나를 기억하는'너'가 없다면 그 삶은 얼마나 무가치한 삶인가. 비록 내가 죽더라도 나를 기억해주는 '너'가 있기 때문에 내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안에 있는 것이다. 삶이란 이렇게 '남'을 만나 그 남을 '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때였다. 40명 정도 되는 학생들 중에서 절반 정도가 옆 친구의 손을 꼭 잡거나 서로 흐뭇하게 쳐다보거나 어깨를 부여잡거나 했다. 그 표정들은 마치 "응! 네가 바로 그 '너'인거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한 나도 예상하지 못한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뒤에서 듣고 있던 교사들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함박웃음이셨다.

학생들에게 왜 우리는 왕따가 되는 학생들을 괴롭히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너'가 아닌 '남'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너라고 하면 그가 받고 느끼는 고통과 슬픔에 우리는 감염될 수밖에 없다. 감정을 공유한다면 차마 때리거나 괴롭힐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친구가 네가 아닌 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아무런 감정적 유대도 느끼지 못한다. 그의 고통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남'이 '너'가 된다는 것은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너'가 되어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것, 그를 통해 감정적 유대가 형성될 때 남은 '너'가 된다. 이처럼 '너'는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그런 '쿨'한 자세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고 그 거리를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지키는 것을 '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학교는 내가 남을 만나 '너'가 되어가는 만남의 장소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 힘주어 손을 잡던 그 학생들처럼 말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에 왜 가냐고 물으면 친구 만나서 놀러 가거나 급식 먹으러 간다고 말한다. 공부하러 학교 간다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른들은 한심해 하겠지만 그건 개탄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친구 만나러 학교 간다는 말은 학교가 아직 학생들에게 삶의 터전이기는 하다는 점에서 기뻐해야 할 일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점점 학교가 만남의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이 '너'가 되기는커녕 남이니까 괴롭히고 혹은 남이니까 신경 끄고 사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게 하는 그런 무감한 동네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학생들을 만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다음 교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너 되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이야기에 참가하지 못한 학생들이 그게 뭐냐고 물어보기까지 한다고 한다. 아직 말의 힘이 살아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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