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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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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64>

입력
2012.06.2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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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수는 주인의 의심이 당연하리라 여기고는 자세히 덧붙였고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도인이십니까?

나는 아직 입도하지 않았소만.

대답하면서 서일수는 주막집 주인이 천지도인이라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단양에서 온 물건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아, 그만……. 좀 들어오시지요.

주인이 황망한 얼굴로 두 손을 저어 서일수의 말을 막고는 먼저 안방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다시 방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큰 스승님께서 단양 제천 간에 계시답니다. 박 도인이 보낸 분이시라니 저야 믿을 밖에요.

그가 안방 다락을 열고 고리로 짠 부담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종이에 싼 책이 두 권 있었고 다시 그 아래 대나무로 엮은 합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풀어헤치자 한 권은 목판본으로 찍은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 정성스럽게 필사한 것으로 아직 인쇄된 것은 아니었다. 『천지도경(天地道經)』이라고 박힌 책이 인쇄된 책이고 『천지인가(天地人歌)』라고 장지에 쓴 것이 필사한 것이었다.

그 책갈피에 편지가 들어 있으니 살펴보시랍니다.

주인이 말했고 서일수가 그에게 되물었다.

주인장은 읽어보지 않으셨소?

예, 저는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서일수가 다시 맨 아래 놓인 합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고 다져놓은 이끼 가운데 뭔가 들어 있었다.

허어, 이건 산삼이 아닌가?

그는 뿌리 위에 두텁게 덮인 이끼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다가 냄새를 맡아보고는 탄성을 내지른다.

이것이 언제쯤 왔소?

박 도인이 압송되고 보름쯤 지나서였으니 한 달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봄철이라 날이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다행이로군. 그러나 하루를 다투는 때요. 약으로 쓴다고 하여도 그렇고 팔려면 지금을 넘기면 제값을 못 받을 거요.

주막집 주인이 드디어 실토를 하였다.

박 도인의 언니뻘이 된다니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합니다. 사실 고향에 계신 형님 때문에 제가 도에 들었고, 우리 주막은 천지도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근년에 서학은 서양 나라들의 압력으로 침학이 풀린 데 비하여, 저희 천지도는 교주 신원운동 이래 민란이 일어났다 하여 기찰도 심해지고, 지방 관아에서도 도인이라 알려지면 즉시 가산은 적몰되고 처형해버린다지요.

이것을 내가 가지고 가도 되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박도인 앞으로 보내온 물건이고 그이가 언니에게 당부했다니 저야 손님께 처분을 맡기면 되는 것입지요. 다만, 수결하신 각서를 언문으로 한 장 남겨주십시오.

주인의 청대로 처리를 해주고는 며칠 뒤에 다시 오마고 약조한 두 사람은 애오개 쌍버드나무집을 나섰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이 책과 필사본을 꺼내어 살펴보고 또한 속장에 들어 있는 편지를 보니, 일필휘지 초서로 급히 쓴 내용은 박희도의 체포를 안타까워한다는 점, 포교를 너무 서두른 것 같다는 질책과 함께 그러나 지혜롭게 모면할 것임을 믿으며, 소식에 의하면 조사를 잘 받으면 유언비어나 부화뇌동 죄로 가벼이 처리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일단 애오개 주막에 맡겨 놓으니 천종급 산삼 세 뿌리와 책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에는 만약 시일이 오래 걸리거든 방도를 강구하여 대신할 자를 정하라는 것이며, 한양에서 방각본의 책점이 많으니 경(經)과 가사(歌詞)를 더불어 간행하되 각각 일천 부를 찍을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등잔불을 돋우어 밝히고 각자 돌아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천지인가』는 언문으로 지은 가사로 몇 장이 안 되는 것이라 잠시 동안에 읽었지만 『도경』은 한 대장부의 평생의 뜻을 밝힌 것이어서 곱씹어 읽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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