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경기 평택시 세교동 영신마을. 10여 가구가 농사를 짓는 마을 앞 논은 한눈에도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달라 보였다. 지난달 모내기를 한 논이라면 이때쯤 벼가 자라면서 논이 녹색으로 변하지만, 이 곳의 논은 벼가 자라지 못해 바닥에 고인 누런 물이 그대로 드러났다.
힘없이 축 쳐진 모 하나를 뽑자 썩어 문드러진 뿌리가 쑥 딸려 나왔다. 주변 모들도 뿌리가 썩고 잎은 말라 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이렇게 모들이 전멸한 논이 마을 일대에 약 9ha나 펼쳐졌다. 모는 아직 살아 있어도 생장이 떨어져 소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논까지 합치면 피해 면적은 더욱 늘어난다.
104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 속에서도 이 마을 논에는 아직 물이 고여 있다. 논 바닥이 쩍쩍 갈라진 것도 아닌데 모가 죽어 나가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묻자 주민들의 손가락은 일제히 논두렁 옆으로 흐르는 물을 가리켰다.
영신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 마을은 인근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농업용수가 닿는 끝자락에 있어 애당초 물이 풍부한 곳이 아니다. 올 봄 극심한 가뭄으로 그나마 저수지에서 공급되던 물은 상류 쪽에서 다 소실되면서 마을로 이어진 농업용수관은 거의 말라버렸다. 그래도 모내기를 해야 했던 주민들은 지난달 20일부터 논두렁 옆으로 흐르는 물을 끌어다 모를 심었다. 예년에도 농업용수가 끊길 때면 이따금 썼던 물이지만 올해는 전혀 달랐다.
모들은 생육을 멈추고 하나같이 시름시름 쓰러졌다. 다급해진 주민들은 이달 초 다시 모를 심었고, 그래도 죽자 22일 충남 보령시에서 남은 모를 어렵게 구해와 또 한번 모내기를 했지만 모는 이번에도 죽어 갔다. 이 과정에서 논의 물을 다 빼낸 뒤 농업용수를 넣는 방식으로 수십 차례 논을 걸러냈고, 영양제와 발근제까지 살포했지만 허사였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는 노승석(58)씨는 “6월 25일을 넘기면 모내기를 해도 벼가 여물지 않아 먹을 수 없다”며 “사실상 모를 구할 곳도 없어 올해 농사는 끝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죽인 배수로의 물은 화학약품 공장이 밀집된 쌍용자동차 후문 칠괴산업단지 쪽에서 흘러나왔다. 이 물은 영신마을 논두렁 사이를 3㎞ 정도 훑어 지나간 뒤 도일천과 합류해 서해 아산만으로 빠져 나간다.
이날은 그런대로 맑아 보였지만 바닥을 헤치자 시커먼 개흙이 잔뜩 올라 왔다. 노씨는 “주민들은 가뭄으로 물이 없는 상황에서 논을 그냥 버리느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물이라도 갖다 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해가 커지자 평택시는 뒤늦게 대책마련에 나섰다. 최근 시농업기술센터의 수질검사 결과 문제의 배수로 물에서는 황산이온이 ㎎/ℓ당 632.96(기준치 40)이나 검출됐다. 붕소 2.231(기준치 0.1)와 염소이온 57.44(기준치 30)도 기준치 이상으로 나와 공장폐수에 의한 오염 가능성이 커졌다. 시는 일대 공장에서 정화되지 않은 하수를 내려 보냈을 것으로 보고 이날 경기도 특별사법경찰관에게 수사를 의뢰했다. 시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올해는 특히 가뭄이 심해 전과 달리 오염물질이 희석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관련부서들이 조사 뒤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평택=글ㆍ사진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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