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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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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저녁이 있는 삶

입력
2012.06.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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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손학규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화두를 내 놓아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전 보좌관이자 진보진영의 대표적 정책 브레인인 손낙구의 작품이라 한다.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고 엄숙주의에다 도덕주의로 범벅이 되곤 했던 정치 구호가 비로소 인간의 숨결을 찾은 듯하다. 직관적으로 가슴에 와 닿으면서 시적인 울림이 있는, 독특한 발상이다. 김승옥의 이 한국 문학사에서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 왔다면 '저녁이 있는 삶' 역시 한국 정치사에서 그와 유사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 진보정치를 포함한 범야권의 여타 경쟁자들은 거의 멘붕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은 더 큰 충격을 받았어야 마땅하다. 기본적으로 경제성장론의 지지기반 위에서 약간의 땜질식 복지를 이야기하는 수준의 보수세력에겐 '저녁이 없는 삶'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제, 복지 이슈만 놓고 보면 이번 대선은 '저녁이 없는 삶'이냐 '저녁이 있는 삶'이냐의 구도로 진행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근대 산업사회의 과제는 일정한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 윌리엄 카우퍼가 일찍이 설파한 바를 보라. "불을 지핀 벽난로, 잘 닫힌 창문, 드리워진 커튼, 제자리에 놓인 소파, 주전자에선 물 끓는 소리, 차를 기다리는 찻잔들, 아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여." 방과 후 이런 목가적 삶에 대한 염원은 칼 마르크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이상적인 사회로 제시했던 모습 역시 "오전엔 사냥, 오후엔 낚시, 초저녁엔 목축, 저녁식사 후엔 비평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생활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만의 저녁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구를 다음과 같이 위트있게 묘사한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는데 있다." 동지들의 교육이다, 총화다 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하는 집단적 생활양식을 풍자한 말이지만 어쨌든 저녁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여기서 '저녁'은 생산이 이루어진 후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재생산의 영역을 최대한 인간적으로 보존하자는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계발을 위한, 가족과의 유대를 위한, 친구와의 우정을 위한 휴식과 여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24조에서 "노동시간을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할 수 있는 권리, 정기적인 유급 휴가를 받을 권리"를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저녁 시간'은, 747이라는 기만적인 경제성장 공약을 들고 나와 국민을 호도했던 현 정권과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비전을 보여주는 구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상상력만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긴 어렵다. 저녁은 우리 삶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어린이, 청소년들이 등교해서 공부하는 오전 시간을 인간화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창문을 20cm만 열도록 하자는 교육현장을 감히 학교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미친 지옥 풍경일 뿐이다. 오후 시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소모품처럼 부려먹고 모멸적인 조건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생산현장을 감히 신성한 일터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최소한의 인간성도 버리게 하는 아비규환의 전쟁터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을 바꿔 내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나의 완성된 개혁-진보 집권 청사진이 만들어진다. 표현이야 어떻든 보수 정책의 방향은 결국 '오전엔 사람 잡는 경쟁교육', '오후엔 약육강식 불안노동', 저녁엔 초과근무와 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학생들이 행복한 오전', '일하는 사람들이 공정하게 느끼는 오후', '편안한 마음으로 맞는 저녁'으로 대체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선진화, 인간화된 사회, 품위 있는 국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직 미완성이지만 의미 있는 첫발자국이다. 이제 야권의 다른 경쟁자들이 화답할 차례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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