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밖에서 더 난리" 여유 부리지만 4명 중 1명이 실업자
#.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중심가에 우뚝 솟은 '콰트로 토레스'(4개의 타워). 서울 63빌딩보다 높은 250㎙(최고 57층)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스페인 부동산 버블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연습장 부지를 인수해 2007년 11월 동시 개장할 때만 해도 이 곳은 라틴권(중남미ㆍ남유럽) 금융허브로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때를 기점으로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폭락을 거듭했다. 축구의 엄청난 인기를 반영하듯, 왼쪽부터 차례로 피구-베컴-지단-호나우두 타워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지단 타워는 공실이 너무 많아 아예 지하주차장을 폐쇄했다. 결국 부지 매각대금으로 유명 선수들을 사들인 레알 마드리드만 좋은 일 시켰다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크로아티아와의 '유로 2012'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린 18일 스페인 서부 최대 항구도시 비고. 경기시간인 저녁 8시45분이 되자 낮 동안 북적거리던 거리는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스페인 국민들은 결승골을 어시스트 한 최고 인기선수 이니에스타의 활약에 정열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치 축구로 답답한 현실을 털어버리겠다는 듯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의 뇌관으로 불리는 스페인은 여전히 '정열의 나라'였다.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주말이면 밤 새워 파티를 즐긴 젊은이들이 토요일 아침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시민은 "(스페인은 멀쩡한데) 밖에서 더 난리"라며 이방인의 우려 섞인 호기심에 조소를 날렸다.
하지만 위기의 먹구름은 이미 스페인에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버블 붕괴. 비고 중심가의 부동산 중개소(마이카 인모빌리아리아)에서 만난 사장 마이카 알바레즈(51ㆍ여)씨는 "이미 시내 중개소의 30% 가량이 폐업했다"고 전했다. 쾌적한 해안날씨 덕에 마드리드 못지 않았던 비고의 집값(30평형대가 요즘도 7억~8억원을 호가)이 고점 대비 20% 이상 급락하면서 요즘은 거래 자체가 실종됐다고 한다.
부동산 경기 연착륙을 위한 스페인 정부의 안간힘은 허사가 된 지 오래다. 30세 미만이 집을 빌리면 보조금으로 월 210유로를 주던 제도는 올 들어 폐지됐다. 전체 부동산 대출의 60%(약 1,840억유로)가 부실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은행들은 앞다퉈 담보대출을 줄이고 있다. 한 때 집값의 10%만 있어도 저리 대출을 퍼주던 은행들이 요즘엔 보증인까지 요구하고 있다.
알바레즈씨는 "빚을 내 집을 샀던 이들이 급매물을 쏟아내면서 벌써 경매로 넘어가는 집들이 적지 않다"며 "사람들은 지금 집값이 바닥이라 여기지만 더 떨어질 가능성도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에 신청한다는 구제금융 1,000억유로는 턱도 없고 아마도 2배 이상 더 필요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었다.
실제 마드리드 인근에는 부동산 파동 탓에 건설이 중단된 이른바 '유령도시'가 두 곳(발데루스, 세세냐)이나 된다. 한때 분양가만 8억원을 넘던 이곳 집들이 요즘 3억원대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드리드 등 도심 지역은 물론, 스페인 전역에는 집들마다 'SE VENDE'(팝니다), 'ALQUILAR'(임대 구함) 등의 게시물이 넘쳐난다.
본격적인 긴축정책은 아직 시작도 안됐지만, 시민들의 삶에는 벌써 고단함이 묻어난다. 부채난에 시달리는 지방정부들이 인력 감축에 나서면서 정원사가 없어진 동사무소의 뜰마다 잡초가 무성해지고 있다. 34년째 거주 중인 교민 권미혜씨는 "다급해진 은행들이 규모를 줄이면서 우리 동네에 있던 지점도 5개나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특히 유럽에서도 살인적인 수준으로 알려진 실업률은 이 나라의 최대 고민거리. 평균 실업률은 올해 1분기에 24.4%를 돌파했고 30대 이하나 40대 이상 실업률은 50%를 넘나든다. 비고시 어항의 우고 곤잘레스(55) 선주협회 부회장은 "지난 10년 간의 수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쏟아진 실직자들이 상당수 활황세의 건축업계로 흡수됐었는데, 이들이 최근 대량 실직하면서 건설 분야에서만 전체 실업자 총 500만명의 30%인 150만명이 양산됐다"고 전했다.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중인 경기침체는 신종 직업도 양산하고 있다. 주요 교차로에는 신호대기 중인 차에 다짜고짜 다가와 유리창을 닦아주고 팁을 요구하는 저소득층이 즐비하다. 공용이나 마트 주차장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빈 주차공간을 손짓으로 알려주고 역시 팁을 바라는 이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페인은 지금 무너진 자존심과 경제활력 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미래는 극히 불투명해 보인다. 경제 재도약의 발판인 제조업은 자라(ZARA), 망고(MANGO), 투스(TOUS) 등 일부 의류 브랜드가 전부라 할 정도로 취약하다. 연간 6,000만명이 찾아와 우리 돈 70조원(2011년 599억달러)을 뿌리고 가는 관광산업이 유일한 버팀목인 상황이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와 노동시스템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단기 처방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다. 가령 관광버스 운전기사는 근로조건 규제 탓에 하루 9시간 이상 일하면 무조건 교대해야 한다. 관광객들의 비용 부담이 올라가는 만큼 이 나라의 유일한 캐시카우(현금 창출원)인 관광산업도 경쟁력을 잃고 있는 셈이다.
마드리드ㆍ비고=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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