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서기도 아닌 6월의 예비전력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져 절전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7,8월에는 블랙아웃(전국 동시정전)이 현실화할 우려가 크다. 한데 곰곰이 따져 보자. 전력난이 과연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인가.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닥칠 위험성을 흔히 '시한폭탄'에 비유한다. 시한폭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폭발하도록 장치가 돼 있기 때문이다. 요즘 벌어지는 전력 비상 사태도 '예고된 재난', 즉 시한폭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전력소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늘었으니, 전력 확보에 탈이 안 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우리 국민들의 전력 과소비가 심각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전기요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저렴하다 보니, 부유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 펑펑 전기를 써댄다. 산업경쟁력 강화, 농가 및 서민층 보호 등 각종 명목으로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해 온 탓이다. 지금의 전력 비상은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정책을 쓰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정치권과 정부당국의 합작품인 셈이다.
발전소 건설 등을 통해 전력 공급을 늘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작정 공급을 늘리는 게 정답도 아니다. 전력 비수기에는 과잉 공급으로 오히려 낭비 요인이 될 수 있다. 결국 당장의 전력대란을 막으려면 요금을 올려 수요를 줄이는 게 관건이다. 이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방안이다. 오래 전부터 해법은 나와 있었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지라 정부도 정치권도 선뜻 나서기를 꺼려해 전력 비상을 초래한 것이다.
급증하는 연금 부담도 예고된 재난에 속한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연금수령자 급증 탓에 국민연금은 당초 전망보다 11년이나 빨리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무원과 군인에게 지급할 연금도 국가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수령액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연금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조만간 국가적 재난이 벌어질 게 분명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표 떨어질 일에 앞장설 이유가 없다는 태도다. 폭탄 돌리기를 하는 셈이다.
1,000조원을 돌파한 가계부채는 그야말로 메가톤급 시한폭탄이다.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수년 전부터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뇌관이 될 것으로 경고해왔다. 실제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재정위기를 겪는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보다 높다. 가계부채의 절반 가까이는 주택담보대출이다. 역대 정부마다 체감경기가 좋지 않을 때면 건설경기 부양을 통해 1~2%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써왔기 때문이다. MB정부도 4대강 살리기 등 대형 토목사업을 단기적인 경기관리 수단으로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인위적인 건설경기 부양은 당장의 약발은 좋더라도 결국엔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가계 빚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에 분양가상한제 폐지, 재건축 부담금 부과 중지 등 건설경기 띄우기 정책이 추진되고 있으니,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뇌관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현실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우리는 미래의 위험을 애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도 골치가 아픈 마당에, 미래에 닥칠 위험까지 대비해 비용을 추가로 투입하기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전력대란도 연금 고갈도, 가계부채의 폭발도 조만간 현실의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급속한 고령화가 초래할 건강보험 재정 악화도, 저출산에 따른 생산인력 감소도 금세 닥쳐올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이다.
지금의 위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예고된 재난인 것이다. 근본적인 치료를 미룬 채 땜질 처방에만 매달리면 언젠가 '펑' 터질 수밖에 없다. 이제 폭탄 돌리기를 끝내야 한다. 일시적으론 고통스럽더라도 예고된 재난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후손들의 부담을 키우는 무책임한 짓이기 때문이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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