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1월에 가동을 시작한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소의 양성자 싱크로트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력을 내는 입자 가속기였다. 50년도 더 된 이 기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폐기되었을까? 박물관에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 가속기는 지금도 쌩쌩하게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여기서 가속시킨 양성자 빔을 이용해서 수소의 반입자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실험이 수행되고 있으며, 현재 최첨단의 실험인 거대 하드론 충돌장치인 LHC의 예비단계 가속기로도 이용되고 있다.
양성자 싱크로트론의 다음 세대 가속기로 건설되어 1976년 6월 17일 가동하기 시작한 슈퍼 양성자 싱크로트론은 크기가 양성자 싱크로트론의 열 배나 되어 둘레가 무려 6㎞가 넘고 출력도 13배에 이르렀다. 슈퍼 양성자 싱크로트론은 약한 상호작용의 매개입자를 발견하는 커다란 업적을 남긴 가속기다. 이 가속기 역시 가동을 시작한지 3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LHC의 예비단계 가속기의 역할을 비롯해서 여러 실험에서 전 방위로 활약하고 있다. 얼마 전 화제를 모은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 실험에서 중성미자를 만들어 내는데 사용된 것이 바로 이 가속기다.
최첨단의 연구를 하는 데에는 최신의 기계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속기의 세계에서는 이처럼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활약하는 거대 가속기가 드물지 않다. 1975년 가동을 시작한 이래,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최대의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 국립연구소의 테바트론도 36년 동안 두 종류의 쿼크를 발견하는 등의 거대한 업적을 남기고 작년에 가동을 멈췄다. 최근 완전히 해체된 미국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의 베바트론은 최초의 대형 가속기의 하나였는데, 1954년 완성되어 1993년까지 약 40년간 활약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가장 첨단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최신의 물리학 실험에서 같은 기계를 수십 년씩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이들 실험이 거대한 실험이기 때문이다. 거대 가속기란 최초의 계획이 수립되어서 건설되는 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현재 가동 중인 LHC 가속기의 아이디어가 처음 논의된 것은 1984년이고, 공식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2년, 건설이 승인된 것은 1994년이다. 가속기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이 2001년부터이고 기계가 완성되어 가동을 시작한 것은 2008년이니, 건설 기간만 해도 8년, 승인에서 준공까지는 14년, 최초의 논의부터 세면 무려 24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실험을 시작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거대한 연구는 시간적인 스케일도 거대하다.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 실험의 목적이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변하지 않는 현상을 우리는 자연 법칙이라고 부른다. 자연 법칙을 탐구하는 일의 본질은 지금이나, 삼십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다르지 않다. 특히 가속기 실험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탐구하는 실험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거대 가속기 실험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도 가속기 연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고, 몇몇 가속기가 실제로 건설 중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기초과학연구의 중요한 핵이 될 기초과학연구원에서도 중이온 가속기가 핵심 시설로 설치될 예정이다. 지금 계획되는 가속기가 비록 출력만으로 본다면 유럽에서 50년대에 만들어진 양성자 싱크로트론보다도 작은 가속기지만,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거대 시설이다. 기초 연구를 위한 가속기와 같은 거대한 계획은 산업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사실, 가속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순수 학문은 모두 그렇다. 그런 관점은 압축 성장 속에서 살아온 우리에겐 낯선 일일지 모른다. 물론 세상에는 빨리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리 하는 것도 분명히 나름의 장점이다. 그러나 시간의 제약 없이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이강영 건국대 물리학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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