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주차하시면 안됩니다. 저쪽으로 옮겨주시죠." "그쪽에도 차를 대면 안됩니다. 다시 이쪽으로 옮기시죠."
지난 13일 오후 3시 경기 평택시 한 주유소 옆 공터에서는 단속차량의 주차문제를 두고 한국석유관리원 직원들과 주유소 사장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주유소 사장이 시간을 버는 사이 주유소 직원들은 재빠르게 주유기에서 뽑은 기름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옮겼다. 뒤늦게 주유기에서 시료를 뽑아 검사했지만 결과는 정상. 하지만 검사원들은 지표투과레이더(GPR)를 이용해 숨겨놓은 유류저장탱크를 찾아냈다. 이 주유소는 품질검사에 적발되지 않도록 이중탱크를 설치하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이중밸브 장치 조작을 통해 가짜 경유를 팔고 있었다. 단속에 나섰던 한국석유관리원 직원 A씨는 "보통 이중밸브는 주유기 바로 밑에 설치하는데 이 주유소의 경우엔 주유기와 주유기 사이에 숨겨둬 찾는데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석유 값의 고공행진이 지속되면서 가짜석유 판매, 송유관 기름 절도 등 석유 관련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해 가짜석유를 판매하다 적발된 사례는 571건. 4년 전(279건)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는데, 관리원 측은 같은 기간 동안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이 26% 이상 상승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의 유가정보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2007년 말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은 1,525.87원이었지만 지난해 말에는 1,929.26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집중적인 단속만큼이나 가짜석유 판매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이중탱크를 설치해 리모컨으로 이중밸브를 조작하는 것은 기본. 탱크에 격벽을 설치하거나 별도의 홈을 만들어 가짜석유를 감추기도 한다. 또 가짜석유 판매자들끼리 연합회를 구성해 월 회비로 단속 벌금을 납부(보험가입형태)하고 단속 직원의 신상과 차량번호 등의 정보도 공유한다.
자연히 석유관리원의 단속 방법도 진화할 수 밖에 없다. GPR, 산업용 내시경, 리모컨 전자파 탐지기 등 첨단 장비가 동원된다. 또 최근에는 가짜석유 제조에 사용되는 용제의 유통망을 중심으로 제조자와 주유소 등의 관계도까지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가짜석유 제조ㆍ유통ㆍ판매망을 일망타진하기 위함이다. 석유관리원 관계자는 "최근 단속기술과 처벌이 강화되면서 유사석유를 판매하는 주유소는 줄었지만 온라인 판매나 성인용품점을 가장한 노상판매를 하는 등 유통방법이 다변화하고 있는 게 더 문제"라며 "가짜석유를 파는 주유소만 단속해서는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짜석유뿐만 아니라 기름도둑들도 늘고 있다. 올 5월 대전경찰청에서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고압호스에 연결한 뒤 유조차에 옮기는 방법으로 휘발유와 경유 14만8,000리터(시가 2억8,000만원 상당)를 훔쳐온 일당 10명이 붙잡혔다. 이들은 송유관 천공기술자와 굴착반, 관리책, 운송책 등 업무분담은 물론이고 발전기와 용접기, 천공기, 고압호스와 누수탐지기 등 첨단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만큼 치밀하다. 전국의 땅에 묻힌 송유관은 1,311km. 이를 통해 국내 경질유(휘발유, 등유, 경유, 항공유) 사용량의 53%인 1억3,300만 배럴이 운반된다. 고유가 시대에 도유(盜油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다. 실제로 2005년 1건에 불과했던 송유관 기름절도가 지난해 15건이 발생했다. 올해는 5월까지만 벌써 10건이 적발됐다.
송유관 절도에 대응한 당국의 노력도 눈물겹다. 2007년 관로 순찰을 전담하는 '파이프라인 패트롤(PLP)' 팀을 만든 데 이어 현재 순찰을 전담하는 자회사만 5곳을 세웠다. 경찰이 즉각적으로 출동하기 어려운 전국 200개 취약지구에는 '순라(巡邏)꾼'이라 불리는 순찰팀원들을 365일 돌리고 있다. 또 송유관 흐름에 미세한 변화도 감지하는 누유감지시스템(LDSㆍLeak Detection System)가 설치돼 있다.
대한송유관공사 중앙통제실 관계자는 "2006년 이후 늘어난 도유 범죄에 대응키 위해 누유방지시스템 기술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와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이라며 "수억원을 투자해 치밀하게 도유를 시도하는 일당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장에서 적발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름도둑들이 송유관을 뚫는 과정에 기름이 유출돼 토양과 수질오염을 시키는 문제가 있어 검거보다는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게 대한송유관공사 측의 설명이다.
성남=박철현기자 kar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