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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roy/ 텅 빈 상가… 이젠 '용산 키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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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roy/ 텅 빈 상가… 이젠 '용산 키즈'는 없다

입력
2012.06.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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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대낮이었지만 인적은 드물었고 불 꺼진 가게들도 즐비했다. 입구에 '임대문의' 연락처 메모를 붙인 점포들도 쉽게 발견됐다. 불야성을 이뤘던 옛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8년째 PC도소매장을 운영해 왔다는 A(40) 사장은 "손님으로 북적댔던 게 대체 언젠지도 모르겠다. 권리금 한푼 없이 점포를 내놓아도 문의조차 없다"고 푸념했다. 다음 달 1일 오픈 25주년을 맞는 용산전자상가는 그렇게 흉물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용산전자상가가 처음 문을 연 건 1987년7월1일. 정부 시책에 따라 청계천 세운상가에 있던 전자제품 점포들을 이곳으로 이전됐고, 이어 나진상가 선인상가 원효상가 터미널상사 전자랜드 전자타운상가 등이 들어서면서 거대 전자 유통밸리가 만들어졌다. 일본 대만 등에서 주로 부품을 들여와 저렴한 가격에 조립PC를 팔며 성장해 온 용산전자상가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 매출 10조원을 상회하는 아시아 최대규모의 'IT 메카'로 평가 받았다.

전문가들은 오늘날 IT코리아의 발원지를 용산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IT의 시작은 PC이고, 한국이 IT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전 세계에서 PC보급이 가장 빨랐기 때문인데, 용산의 조립PC가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정이든 사무실이든 초창기 PC는 삼성전자나 LG전자가 아니라 용산의 조립품이 대부분이었다. 용산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PC가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고 IT강국도 요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용산전자상가를 '한국판 실리콘밸리'라 불렀다. 하지만 단순히 매장이 많고, 제품과 부품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컴퓨터나 게임기에 빠진 젊은이들에겐 이곳이 정보교류장소였고 연구실이었고 실습실이었다. 이 곳에서 꿈을 키워갔던 이른바 '용산키즈'다.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애국적 소프트웨어인 '아래아한글 2.0' 버전을 이곳에서 처음 공개(1992년5월)한 것도 용산키즈와 비전을 공유한다는 취지였다.

"당시엔 열정만 있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이 곳에선 실패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줬거든요. 예를 들어 한번 부도를 냈던 사람과도 다시 거래를 해줬지요."

대기업을 퇴사하고 1996년부터 PC조립 업체로 용산전자상가에 입문한 박종신(41) 더가치 대표의 얘기다. 그는 문화 코드를 잉태시켜 갔던 'IT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 역시 창업 1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아 회사를 정리했다가 노트북 중심의 포트폴리오로 다시 재기한 대표적인 '용산 키즈'군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용산은 더 이상 그 때의 용산이 아니다. 한편으론 기술력과 판매망을 가진 대형 IT업체들이 등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용산 스스로 불법복제품과 바가지상술 같은 낡은 관행을 떨쳐 내지 못하면서, 이젠 존립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됐다. 용산의 불이 하나 둘씩 꺼지면서, 용산키즈도 더 이상 배출되지 못하고 있다. 꿈과 열정, 창의력이 모두 사라졌다는 얘기다.

강평구 나진전자월드연합상우회 회장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용산을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고 소비자도 바뀌었는데 우리만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IT저변이 넓어지려면 용산 같은 곳이 꼭 필요합니다. 어떻게든 용산을 다시 부흥시켜야 합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 PC방 창업 열풍 타고… 쑥쑥쑥 '용산의 신화'

“중ㆍ고등학교 때 용산전자상가를 밥 먹듯이 드나들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있겠죠.”

게임 벤처 ‘플라스콘’의 공동 대표인 차경묵(32)씨는 중학교 때인 1990년대 중반 처음 386 PC를 구입한 뒤로, 주말이면 뻔질나게 용산전자상가를 다녔던 ‘용산 키드’다. 곱상한 외모에 샌님 같았던 아들이 낑낑거리며 PC를 조립하는 모습은 기계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차씨는 고교 졸업 후 바로 꿈꾸던 게임개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게임회사에서 나와 시도한 첫 창업은 실패했지만 2010년 두 번째 창업은 잘 진행돼 지난해 국내 최대게임사인 넥슨의 투자도 유치했다. 올 초 ‘체인팡’이라는 모바일 게임을 선보였고, 현재 차기 작품을 개발 중이다.

현재 인터넷ㆍ게임 등의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30~40대 중에는 이처럼 1990년대 학창시절 용산전자상가를 내 집처럼 들락거린 추억을 갖고 있는 ‘용산 키드’들이 많다.

인텔 286, 386, 486, 펜티엄 프로세서를 채택한 PC가 차례로 나오면서 개인용 PC가 급속도로 보급됐던 이 시기는 용산전자상가의 최전성기로 불린다. 대기업 PC보다 저렴하고 원하는 부품만 바꿔 마음대로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조립PC가 용산을 통해 전국에 급속도로 보급됐다. 이로 인해 1988년까지만 해도 인구 100명 당 1.12대에 불과했던 PC보급률은 10년 만인 98년 말 17.86대로 늘게 됐다.

전화선을 통해 접속하는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이 번성했던 90년대 초반, 용산 키드들은 PC통신 게시판에 올라오는 용산 업체들의 부품 가격을 적어 두었다가 주말이면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앞 지하보도(일명 ‘용산 굴다리’)를 지나 나진상가, 선인상가 등을 배회하며 부품을 골랐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다 즐긴 게임팩을 중고로 되판 뒤 다시 중고 팩을 구입하기 위해 용산을 찾았다.

물론 잘 나가던 이 시절에도‘용팔이’라 불리는 악덕업주들의 횡포는 악명이 높았다. 손님이 제품 가격을 물어보면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요”라고 물어본 뒤 손님이 부른 가격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높은 마진을 붙여 팔기 일쑤였다. 당시 PC통신 게시판에는 ‘용팔이에게 사기 당하지 않는 방법’과 관련된 게시물도 많았다.

복제품 문제도 심각했다. 신용산역 굴다리에는 복제품을 파는 상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PC를 팔 때도 복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파는 것이 당연시돼 있었다. 복제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91년 처음으로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인 ‘V3’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용산전자상가의 호시절은 2000년대까지 계속된다. 1998년 출시된 게임 ‘스타크래프트’가 기폭제였다. 스타크래프트가 전국적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 최초로 게임대회를 TV에서 중계하는 일까지 일어났고, 게임만 하는 신종 직업인 ‘프로게이머’가 생겼다. 스타크래프트 열풍은 98년 두루넷을 시작으로 99년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이 초고속 인터넷을 서비스하면서 PC방 열풍으로 번졌다.

외환위기 직후 명예 퇴직자들이 너도나도 PC방 창업에 동참했고, 98년 처음 생기기 시작한 PC방 수는 2년 만에 무려 2만개를 돌파했다. PC방 한 곳당 평균 PC대수는 70개. 2년여 동안 PC방만으로 140만대의 PC 수요가 창출된 셈이다. 대부분 PC방은 값비싼 대기업 제품 대신 저렴하고 부품 교체가 용이한 조립PC를 선택했다. PC방 열풍의 최대 수혜자는 용산 상인들이었다.

이 기간 초고속 인터넷도 빛의 속도로 보급돼, 2002년 광대역통신망 가입자 수가 세계 최초로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제 모든 가정에 PC가 보급된 것은 물론 인터넷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 100명 당 PC 대수는 98년 17.86대에서 2001년 47.5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우리나라가 ‘IT 코리아’ ‘IT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가정마다, 사무실마다 보급된 PC였다. 빠르고 높은 PC보급률은 용산덕분에 가능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지금의 IT강국이 된 일등공신은 바로 용산상가다”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PC보급이 포화상태에 도달하면서 용산전자상가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은 역설적으로 ‘정보의 평등’을 가져오면서 용산전자상가의 몰락을 재촉했다. 손님에게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라고 물어보며 ‘발품 팔기 아니면 바가지 쓰기’를 강요하던 업주들은 ‘다나와’라는 가격비교사이트에 부품 가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면서 사실상 무장 해제 당했다.

용산전자상가 관계자는 “이제 손님들은 PC를 사러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이 곳 업체들의 조립PC를 사면서도 직접 오기 보다는 온라인몰을 통해 구입하고 있다”고 달라진 풍경을 전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용산이 낳은 대표기업

나진 선인 원효 등 전자상가가 밀집한 용산은 생산과 판매가 동시에 이뤄지는 시장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업체간 상호 경쟁을 통해 기술력 향상도 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과정에서 용산과 함께 뜨고 진 기업들도 많았다.

용산이 낳은 가장 스타기업으론 2000년대 초 저가 PC돌풍을 일으킨 ‘현주컴퓨터’가 있다. 1989년 용산 전자상가 내 월세 12만원짜리 점포에서 시작해 20여년 만에 연매출 3,000억원의 중견업체로 성장한 현주컴퓨터는 당시 삼성, LG-IBM 등 대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업계 3위를 차지하며 ‘벤처신화’의 대명사로 불렸다.

성공비결은 가격경쟁력에 기반한 파격적인 마케팅. 당시 저가 조립 PC붐이 일고 있던 대학가에서 ‘판매 2년 후 반값으로 되사주기 보장’ 등 차별화된 마케팅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PC시장 쇠퇴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무리한 마케팅이 부메랑이 돼 결국 2005년 부도를 맞았다. 이 무렵 로직스, 컴마을, 나래앤컴퍼니 등 현주컴퓨터와 함께 용산을 근거로 성장한 다른 PC회사들 역시 차례로 문을 닫아야 했다.

아직 건재한 업체들도 적지 않다. 전력산업과 IT를 접목, 국가핵심 성장과제 주관기업으로 선정된 ‘KD파워’도 그 중의 하나. 이 기업도 약 20년 전 용산 전자상가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 회사들이 PC제조나 유통업을 중심으로 세워졌지만 KD파워는 IT기술을 전력산업에 적용하는 신기술 개발에 집중, 독자적인 영역을 일궈냈다. 최근엔 태양광, LED 분야에도 진출해 해외로 뻗어나가는 등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아이코다’란 브랜드로 유명한 PC판매업체 ‘아이앰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회사도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 현재 연 매출 1,300억원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뭐니뭐니해도 용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은 ‘다나와’다. 상가가 집적된 용산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 PC부품을 비롯한 종합적인 가격비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대박을 터뜨렸다. 제품 구입 때마다 모든 매장을 다 돌아다니는 게 불가능했던 소비자들은 다나와의 점포별 가격비교를 통해 발품의 불편을 덜게 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다나와 때문에 업주들이 저가 출혈경쟁을 부추기게 됐다. 어떤 의미에선 다나와가 용산의 몰락을 재촉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업체는 현재도 PC등 전자제품 온라인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다.

용산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인력들 대부분은 지금 용산을 떠났다. 용산에서 출발했다는 한 벤처기업 관계자는 “용산이 IT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한 인재양성소였던 건 분명하다”며 “산업적,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제2의 벤처붐이 일 수 있도록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 온라인몰 역풍 맞고… 뚝뚝뚝 '용산의 눈물'

용산전자상가의 전성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 늘 인파로 북적였고, 하루에 1,000만원 이상을 매출을 올리는 매장도 있었다. 하지만 용산 사람들은 지금 “모든 게 절반 이하가 됐다”고 말한다.

위기는 조금씩 서서히 찾아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하나씩 쌓이는 악재 앞에 용산전자상가의 신화는 무너져갔다.

가장 크고 위협적인 적은 온라인이었다. 용산에서 시작된 인터넷의 물결이 정작 용산의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1988년부터 용산에서 PC와 주변기기를 팔아온 안영섭(62) 씨는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용산전자상가의 매력은 밀집해 있는 매장들을 돌아다니며, 좀 더 싼 제품을 고를 수 있는 것.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면 발품을 팔지 않고도 손쉽게 가격비교가 가능하다. 안 씨는 “10명 중 3명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최저가격을 보여주며 가격을 흥정하려 한다”며 “예전에는 옆 매장들과 경쟁을 했지만 요즘에는 온라인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매장은 매출뿐 아니라 수익성도 악화시켰다. 오프라인 매장은 임대료나 인테리어비, 인건비로 인해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도 온라인 가격과 비교해 폭리를 취한다는 비난에 직면한 것. 용산전자상가 내 선인상가에서 휴대폰을 판매하는 김모(48)씨는 “오프라인 매장들도 가격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최저가격에 맞춰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제품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요즘은 온라인으로 주문만 받는 매장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곳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상인은 “온라인 전용매장 중엔 하루 포장하는 물품수가 2,000개가 넘는 곳도 있다”며 “하지만 가격경쟁이 심해 이익은 거의 남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발길이 줄어든 것도 이런 이유다. 안씨는 “요즘엔 인터넷으로도 구입하기 힘든 물건이나 아예 인터넷 잘 못하는 어르신들이 주로 용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용산 스스로 쇠락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 등 불투명한 거래와 바가지 요금, 과도한 호객 행위 등이 결국 부메랑이 됐다는 지적이다.

한 상인은 “예전엔 덤터기를 씌우거나 판매를 강요하는 ‘용팔이’라고 불리는 악덕상인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휴대폰의 경우 가게 밖에는 최소가격으로 붙여놓고 개별 상담을 하면서 소비자를 현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것 역시 손님이 많았을 때 얘기”라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은 “초창기엔 조립PC를 팔면서 이런 저런 불법 소프트웨어를 끼워줬다. 하드웨어만 팔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는 정품과 불법제품의 구별에 대한 인식이나 그런 것이 죄라는 생각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보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IT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PC수요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컴퓨터 사양에 따라 부품을 구입했던 예전과 달리 PC성능향상이 한계에 다다랐고,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의 등장으로 카메라 MP3 네비게이션 노트북의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또 다른 상인은 “이젠 소비자들이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삼성전자와 LG전자 제품을 사려고 하지 굳이 용산을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IT시장 자체가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용산의 설 땅은 없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용산전자상가의 르네상스는 가능할 까.

전문가들은 일본 도쿄의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를 용산이 벤치마킹해야 할 모델로 제시한다. 아키아바라는 1970~80년대 세계 최대 전자제품거리로 명성을 날렸지만 대형 전자양판점의 등장으로 용산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90년대말부터 체질개선에 들어가 코스프레행사 같은 볼거리를 만들고 카페 등을 유치, 지금은 일본산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의 메카이자 ‘오타쿠(마니아)’문화의 발원지로 평가받고 있다. 꼭 전자제품을 사지 않더라도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도쿄의 대표적 명소가 됐다.

안 씨는 “지금 용산은 저녁 7시만 넘으면 다 퇴근해 버려서 주변이 깜깜한 골목이 된다”며 “전자상가만의 놀이 문화를 위해 게임 대회를 개최한다든가, 아바타 만들기와 같은 행사를 개최하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온라인 쇼핑몰에 견줄만한 용산전자상가만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인 김모씨는 “인터넷 쇼핑몰처럼 전자상가에서도 적립금이나 쿠폰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면서 “어차피 온라인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오랜 오프라인 체질을 벗어버릴 때가 됐다”고 말했다.

김예원 인턴기자(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3학년)

채정기 인턴기자(숙명여대 일본학과 4학년)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 터줏대감 강평구 상우회회장

‘25년 용산맨’은 실타래처럼 얽힌 현 용산전자상가 문제의 해법에 대해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에서부터 찾았다. 용산전자상가 내 사무실에서 만난 강평구(65ㆍ사진) 나진전자월드연합상우회 회장은 “이 곳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는 고객들이 우리 상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고객과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이 곳에서 먹고 살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용산전자상가가 오픈(1987년)한 해에 가전제품 판매점으로 장사를 시작한 그는 이후 줄곧 이 곳을 지켜온 ‘용산 1세대’이다. 용산전자상가의 문제는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부에서 비롯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용산전자상가와 비슷한 일본 아키하바라를 보세요. 거긴 작은 케이블 같은 제품까지도 철저하게 정찰제로 판매를 하고 있어요. 상인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믿음은 자연스럽게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키하바라는 정찰제 고수 및 마일리지 활용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정책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데 반해 용산전자상가는 아직 정찰제도 정착되지 않은 탓에‘부르는 게 값’이라는 인식이 팽배, 고객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착제 확립은 용산전자상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저 마진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용산전자상가만의 차별화되고 독자적 서비스를 발굴하고 개선돼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예를 들어 조립식PC를 구매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애프터서비스(AS)”라며 “이 곳에서 구매한 조립식 PC를 정품을 구매할 때와 유사한 수준으로 AS를 제공한다면 용산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는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매출 또한 향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곳 상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고 있는 온라인 쇼핑몰 문제 역시 자성을 강조했다.

“예전처럼 이 곳에 가만히 있으면 고객들이 찾아올 줄 알았던 겁니다. 흐름에 따라 변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던 게 결정적인 패인이었습니다.”

용산전자상가엔 영세 자영업자가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책적인 보조 역시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특히 PC와 같은 고가 제품은 현금 보단 카드 결제가 많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카드수수료에 대한 혜택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제조사와의 관계개선에도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 그는 “제조사가 갑(甲)의 위치를 악용해 을(乙)인 유통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밀어내기식의 정책을 강요하는 관행은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글=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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