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신천동 A아파트단지. 송파구가 지난달 말 '잠실나루 시니어 택배'를 시행한다고 홍보한 곳이다. 하지만 택배의 거점인 경로당에서 물건을 나르는 노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배달할 만한 상자 더미 등도 전혀 없었고, 경로당 밖에 택배용으로 제작한 붉은색 손수레들만 나란히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한 노인은 "주민들 반대가 심해 택배를 안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시니어 택배는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단지 내에서만 물건을 배달하는 새로운 개념의 노인 일자리창출 사업이었다. 지방에서 노인 택배를 도입한 사례가 있지만 서울에서 아파트단지 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첫 시도다. 시작도 못하고 무산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달 30일로 돌아가보자. 이날 오전 잠실4동 주민센터는 경로당에서 시니어 택배 개소식을 겸한 경로잔치를 열려고 했다. 행사에 앞서 구청장과 지역 국회의원, 각종 단체장 등 300여 명에게 초청장을 발송했고, 음식까지 마련했다.
헌데 변수가 생겼다. 전날 오후 긴급 동대표회의가 소집돼 반대 여론이 급부상한 데 이어 행사 직전 반대측 주민들이 찾아 온 것이다. 항의가 빗발치자 결국 개소식은 취소됐고, 시니어 택배는 없던 일이 됐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취지는 좋았지만 사전 조율이 부족했고, 반대 여론이 강했다"고 말했다.
반대 측 주민들은 ▦경로당에 물건을 내리기 위해 지상 중앙통로로 택배차가 다니면 사고 위험에 노출 ▦20명이 혜택을 보는 수익사업을 위해 아파트 중심부를 내주는 것은 불합리 ▦노인들이 배달을 하면 마음 편히 못 받고, 잘못된 물건 반품 등도 어려움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 등의 이유를 들었다.
노인들은 발끈했다. 김모(69)씨는 "노인들이 조끼를 입고 배달하러 다니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얘기까지 들었다"며 "무산된 것 보다 그 이유에 더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니어 택배는 "일거리가 필요하다"는 노인들의 의견을 수렴한 잠실4동의 아이디어였다. 아파트 출입통제가 갈수록 강화되는 상황에서 실거주자인 노인들이 배달하면 시간과 비용이 절감돼 택배회사도 윈-윈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잠실4동은 현대택배와 약 3개월간 협의해 유휴공간이 있는 경로당까지만 물건을 가져오면 건당 700원씩을 받고 각 가구까지는 노인들이 배달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근로소득세와 보험문제 등을 마무리 지었고, 토요일에는 주민센터 직원이 교대로 일을 봐주기로 조까지 짰다. 1차로 선발된 20명의 노인들은 월~토 오전 10시부터 4~5시간 일하면 한달 평균 70만원 정도의 소득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물거품이 돼 버렸다.
최세열 잠실4동장은 갈등을 의식한 듯 "이미 무산된 만큼 이 일로 더 이상의 주민 분열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운영시스템은 검토가 끝나 장기적으로 다른 아파트단지에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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