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일 납북자로 추가 인정한 351명의 뒷얘기를 들어보면 분단의 고통이 납북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을 무겁게 짓눌러왔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납북자들은 좌익 활동을 하지 않고 월북하지도 않았는데도 상당수 납북자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등의 얘기를 들으면서 불이익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상당수 납북자는 이념과 무관한 일을 했고, 일부 납북자는 좌익세력 척결 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상당수 납북자는 오히려 "북으로 넘어갔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납북자로 인정된 윤태경씨의 아들 창식(71)씨는 20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막내 동생이 ROTC 원서를 냈지만 빨갱이란 소문 때문에 낙방하는 등 그 동안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늦었지만 아버지 문제가 해결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윤태경씨는 1909년 서울 출생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교육위원회 장학지도관으로 근무했고, 1949년에는 국회 감찰위원회 정보관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1950년 9월 서울 종로구 내자동 자택에서 내무서원들에게 납치된 뒤 소식이 끊겼다.
납북자 명단에는 1940년대 교육계와 산업계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김근호 동양기선 전무이사 겸 배재학당 이사장도 포함돼 있다. 1907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김근호씨는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인천에서 민족자본으로 운영된 동양기선 전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배재학당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는 사재를 배재학당에 기부해 이사장을 겸임하면서 교육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 김씨는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인근 동료 집에 피신했다가 1950년 7월 종로구 가회동 집에 잠시 들렀다가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 됐다. 백운선 동아일보 사진부장은 이길용 체육기자와 함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1950년 7월 마포구 공덕동 자택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됐다.
좌익 세력 척결에 앞장섰던 인물들도 납북자 명단에 포함돼 있다. 조병옥 의원 보좌관을 지낸 신치호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본부, 통일처 등에서 근무하며 좌익 사상범과 간첩 혐의자 등을 조사하는 일을 했다. 6ㆍ25 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1950년 7월 용산구 자택 인근에서 인민군에 발각돼 경찰서로 연행된 뒤 사라졌다. 신치호씨의 딸 경순(66)씨도 "뒤늦게 아버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정부는 60년 넘게 고통을 받고 있는 다른 납북자 가족들의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정원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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