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한 다문화가정을 소재로 한 뮤지컬 '아리랑 판타지'를 본 사람들은 주저없이 말한다. "주인공이 진짜 필리핀 여자여서 그런지 연기가 정말 실감난다"고. 뮤지컬은 한국에 시집온 필리핀 며느리가 남편을 사고로 잃은 뒤 시어머니와 살아가며 겪는 갈등과 화해를 그렸다. 지난해 6~9월 전국 28개 지역 공연에서 전회(56회) 매진, 평균 115% 객석 점유율의 기록에 힘입어 지난주부터는 충북 진천을 시작으로 앙코르 공연에 들어갔다.
지방 순회 중간에 서울 왕십리 집에 잠깐 들른 '필리핀 며느리' 체리쉬 마닝앗(27)을 20일 만났다. 그는 실감나는 대사로 객석을 눈물 바다로 만들고 있는 이자벨 역할을 맡고 있다.
'아리랑 판타지'인기 비결을 묻자 "결혼이주여성들의 진짜 이야기"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시집온 동남아 여성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쌍하고 문제 있는 집안에서 산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우리도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게 관객들을 감동시킨 것 같아요." 국내 유일의 필리핀 출신 뮤지컬 배우라는 점도 흥행의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필리핀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며 연극 배우를 꿈꾸던 그는 한류라는 말도 생소하던 6, 7년 전쯤 한국 가수들의 역동적인 공연을 보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대학의 장학생 제도를 접했고 장학금을 받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2006년에 입학했다. 한예종에서 본격적인 연기와 연출을 배운 뒤 직접 만든 작은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노래하는 열 두 동물 이야기' 등 다른 뮤지컬에도 출연했다. 그는 "모두 연극 공부였다"고 했다.
그러다 2년 전 지인의 제안 하나가 뮤지컬 배우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필리핀 이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 참여를 권유받은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단박에 거절했다. 온통 유학 생각뿐이어서 처음엔 무시했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대본을 접한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출연 계약서에 덜렁 서명했다. "대본을 중간에 덮을 수가 없었어요. 편견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문화 가정 여성들이 떠올랐던 거죠."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남편의 나라에 정착한 만큼 '꿈'도 다시 설정했다. "지금 연극도 사실적이지만 이보다 더 리얼한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 겁니다. '나는 까맣고 한국말도 느리게 해요. 하지만 나쁜 사람도 바보도 아닙니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봐주세요'라는 대사에 더 이상 흐느끼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요."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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