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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낭만과 이색 체험의 낙원 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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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낭만과 이색 체험의 낙원 피지

입력
2012.06.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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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00m 낙하 '짜릿' 정글 속으로 '오싹' 은하수 총총 '황홀'

내가 미쳤다.

1만 4,000피트(ft).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얼추 4,300m다. 북한산의 5배, 63빌딩의 16배, 내가 사는 15층 아파트의 100배쯤 되는 높이다. 단발 프로펠러 엔진의 세스나가 이륙하고 약 20분, 고도계 바늘이 거의 한 바퀴 돌아 '14,000'을 향해 갔다. 하늘은 파랬다. 머릿속은 하얘…질 줄 알았는데 오만 생각으로 얼룩덜룩했다. 높이의 제곱에 비례해 커져가는 잡념잡상(雜念雜想). 이런 공식은 왜 또 떠올랐을까. 고전역학에 따르면, 이 높이에서 내 몸이 갖는 위치에너지는 몸무게에다 높이를 곱하고 다시 중력가속도 9.8㎨를 곱해야 되니까… 에라, 모르겠다. 여하튼, 엄청 가공할 무지막지 거시기 진짜 말도 안 되게 아찔한 높이란 말이다.

거기서, 뛰어내렸다.

피지(Fiji). 당신에게 이 섬나라의 이미지는 대략 이러한 것이 아닐는지. 미안할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바다와 분유통을 엎어놓은 듯 희고 보드랍게 펼쳐진 모래밭의 남태평양. 거기 야자수 그늘 아래 135°의 기울기로 뉘인 비치체어에 기대어 칵테일을 홀짝이며 자발적 혼수 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 리조트. 일확천금 한다면,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기필코 멋진 아가씨(들!)와 함께 요트를 타고 에메랄드빛 파도를 가르며 무인도로 달려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파라다이스. 이음절어 '피지'는 낙원의 문을 열 때 입력하는 패스워드일지 모른다. 맞다. 그런 환상은 과히 잘못되지 않았다. 거기에 다른 걸 조금 더 보태보자.

# 블루(Blue)

스카이다이빙을 하기로 한 날 새벽까지 매섭게,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많은 비가 내렸다. 겉으로 투덜대는 척하며 속으론 안심했다. 이 날씨에 뭔 낙하산을 타겠어. 하지만 비행장이 있는 난디(Nadi)로 들어서는 순간 구름이 걷히고 말았다. 일행의 표정이, 고공 낙하 경험이 있는 해병대 출신 선배의 얼굴까지 먹구름에 잠기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다시 비가 올 기미는 없었다. 피지 약국에도 우황청심환을 파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걸 간신히 눌렀다. 비행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 말이 없어졌다. 남국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 오늘 뭐 하러 가니?" 나와 한 몸으로 묶여 뛰어내릴 다이빙 강사 팀 조이스가 세스나에 오르며 물었다. 솔직히 대답했다. "미친 짓 하러 가지." 팀은 유쾌하게 웃었다. 젠장, 이게 웃길 수도 있구나. 중형차의 트렁크만한 세스나의 기내에 몸을 구겨 넣었다. 의자도 없었다. 땅이 가마득히 멀어지는 창 밖을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아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봤다. 포경수술을 기다리며 비뇨기과 대기실에 앉아 있던 어린 날의 심정으로 되돌아가졌다. 덜컹. 드디어 문이 열렸다. 왼발부터 허공으로 내밀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팀이 소리쳤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야. 자, 활짝 웃어!"

아! 파란 색이었다. 하늘도 바다도 거칠게 허파로 파고드는 공기도 모두 파랬다. 나는 자유낙하 중이었을 텐데, 분명 창공을 날고 있었다. 낙하 직전의 공포는 허공에 몸을 던지는 순간 쾌감으로 돌변했다. 낙하산을 펴지 않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1분 가량 됐다. 초를 쪼개 나눈 시간의 단위로 변화하는 하늘과 바다와 숲의 푸른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 앞에서 터져 부서지는 그 빛의 알갱이를 언어로 치환해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겐 억겁의 진화가 더 필요할 터이다. 낙하산이 펴진 뒤, 푸른 대기 속을 한참 더 유영했다. <동양기행> 의 후지와라 신야라면 이렇게 쓰지 않을까.

'나는 날았다. 사람들은 슬프도록 못나고 어리석었다. 세계는 좋았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 그린(Green)

피지를 찾는 관광객은 대부분 해변에서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토착민들은 숲에 산다. 많은 마을이 원시림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열대의 숲을 맨발로 걸어, 사륜구동 자동차로 진흙을 튀기며, 때론 모터보트로 급류를 거슬러 그곳을 방문할 수 있다. 한국 여행객들에게 피지의 트레킹은 아직 낯선 체험이다. 하지만 바닷가의 리조트에선 기대할 수 없는 생명력을 피지의 열대림에서 느껴볼 수 있다.

피지 본섬인 비티 레부(Viti Levu) 섬의 남서부 도시 싱카토카(Sigtoka)에서 승합차로 1시간, 오프로드용 자동차로 갈아 타고 다시 반 시간 가량 달려 나이헤헤(Naihehe) 마을에 도착했다. 피지의 마을을 방문하게 되면 독특한 환영 행사인 '얀고냐 의식'을 치르게 된다. 카바라고 불리는 관목 뿌리를 빻아서 만든 음료를 나눠 마시는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음료에 약간의 환각 성분이 있다. 순서가 돼 잔을 드는데 살짝 걱정이 든다. 이걸 마시고 오븐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이 마을이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건 불과 100여년 전까지 남아 있던 식인 풍습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육을 요리하던 으스스한 동굴을 둘러보고 비아우세부(Biausevu) 마을로 향했다. 40m의 폭포도 장관이지만 그 높이에서 마음껏 뛰어내리며 수영하는 피지의 아이들이 인상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아가씨 둘이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지고 섞였다. 처녀인 듯한데 이 폭포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사부나마텔라야(Savunamatelaya)라는 이름의 이 폭포는, 임신 못한 여자들이 몸을 담그면 바로 아기를 갖게 된다는데….

# 블랙 앤드 화이트(Black & White)

난디의 데라나우(Deranau) 항구에서 요트를 탔다. 트롤 낚싯대 8개가 실린 꽤나 호사스러운 배다. 출발 전 회칼과 팩소주를 알뜰히 챙긴 일행은, 청새치 같은 커다란 고기를 잡으면 어쩌나 꽤나 심각히 고민을 했더랬다. 속도를 내서 달리는 배의 뒤로 루어(가짜 미끼)가 부지런히 튀어 오를 때만 해도 <노인과 바다> 의 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 하릴없이 컵라면에 소주를 비운 일행은 하나 둘 선실로 들어가 누웠다. 오후 늦게 출발한 배는 어둠이 내린 바다 속을 계속해 달렸다. 트롤 낚싯대를 걷고 줄낚시로 겨우 건진 돔 몇 마리가 이날 수확의 전부였다.

철수. 배가 항구 쪽으로 이물을 돌리고 속도를 냈다. 아직 항구의 불빛이 먼 피지의 밤바다는 흑단나무 빛깔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결. 갑자기, 배의 모든 불이 꺼졌다. "아!" 고물에 있던 누군가가 짧게 소리쳤다. 나가보았다. 하늘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모양의 하얀 빛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남반구의 하늘. 남십자성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간간이 구름이 낀 하늘이었지만 은하수를 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고기를 잡았다면, 그래서 제 흥을 못 이겨 마지막 밤을 니나노 술추렴으로 보냈다면, 아마 저 별을 볼 수 없었으리라. 피지의 밤하늘이 깊었다. 세상은 아직 아름다웠다.

■ 여행수첩

●대한항공이 인천공항과 피지 난디를 잇는 직항편을 운항한다. 주 3회(화, 목, 일). 비행 시간 약 10시간. ●1피지 달러는 약 630원이다. 3월부터 9월까지가 건기여서 여행하기 좋다.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이르다. ●피지의 관광 콘셉트는 ‘원 아일랜드, 원 리조트(One Island, One Resort)’. 섬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는 럭셔리 리조트가 발달돼 있다. 배낭여행객을 위한 저렴한 숙소는 대부분 본섬인 비티 레부에 있다. ●한진관광(02-726-5712), 피지로하이스트여행(02-717-5335) 등이 피지 여행 상품을 판매한다. 피지 관광청 한국사무소 (02)363-7954. www.fijimekorea.com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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