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퇴직연금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생명은 4월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이 7조5,277억원이다. 그런데 이 적립금 중 50%가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쌓아준 것이다. 한편 한국씨티은행은 최근 퇴직연금 운용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조만간 퇴직연금 계약자 3만2,400여명에게 다른 금융사로 계약을 이전할 것인지 묻는 의향서를 보낼 예정이다. 기존 거래은행을 우선시 하는 국내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번번이 실패한 것이 사업 철수의 주요 원인이다.
퇴직연금 사업이 대형 금융사들에겐 '황금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반면 중소형사엔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대기업들은 대대적 마케팅뿐 아니라 계열사의 몰아주기에 힘입어 세를 확장하고 있지만, 중소형사들은 역마진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업을 접고 있다.
1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월말 기준 퇴직연금 총 적립금액은 52조1,145억원이다. 퇴직연금 시장에 뛰어든 은행과 보험, 증권사 총 51개사의 적립금 총액인데, 이 가운데 1위 삼성생명의 점유율이 14.4%에 이른다. 2위부터 4위까지는 KB국민, 신한, 우리은행 등 모두 은행들이 차지하고 있고 증권사 중엔 유일하게 HMC투자증권이 5위로 상위권에 들었다. 이들 상위 5개사의 특징은 대기업 계열사이거나 중소기업 등 거래처가 많은 대형 은행이라는 점이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인 HMC투자증권은 계열사 적립금 비중이 전체의 89.6%에 달할 정도로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반면 든든한 배경이 없는 중소형사들은 역마진을 감수하다 못 견디고 속속 퇴직연금 사업을 포기하고 있다. 흥국화재, 골든브릿지투자증권, 교보증권은 일찌감치 사업을 접었고 지난달 메트라이프생명도 퇴직연금팀을 해체했다.
한 소형 보험사 관계자는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 제시하는 연간 평균금리는 5% 안팎으로 정기예금보다 1%포인트 이상 높은데 최근 금융시장상황이 좋지 않아 사실상 역마진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며 "여기에 대형사들은 콘도 이용권이나 상품권 등 미끼 상품까지 내거니 경쟁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대형 사업장의 퇴직연금 가입은 대부분 마무리된 데다 관련 규제도 강화되고 있어 중소형사들이 설 자리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김대환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퇴직연금 시장은 인건비와 마케팅비, 전산유지비 등 투자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결국 자본력이 뒷받침되거나 경쟁력 있는 금융회사 위주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기업 위주로 사업자가 재편될 경우 부작용도 우려된다. 손성동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은 "퇴직연금 시장이 과점 형태로 재편되면 수요자 중심에서 공급자 중심으로 바뀔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각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올렸던 금리를 내리거나 서비스를 축소, 폐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다는 본래 취지와 달리 퇴직연금 시장이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들의 또 다른 몸집 불리기 수단에 그치고 정작 가입자들의 혜택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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