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취재를 통해 확인한 우리 학계의 연구부정 실태는 심각했다. 2005년 황우석 사건 이후 연구윤리를 확립하기 위한 제도가 만들어지고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일부에선 "이 정도쯤이야"라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제도운영은 부정을 뿌리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거나 인사철이면 불거지는 정·관계 인사들의 논문 파문도 결국 논문을 남발하는 학계의 해이한 분위기에서 발생한다. 한상권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15일 한국일보사에서 연구윤리에 대한 긴급 좌담을 갖고 어떻게 학문윤리를 확립할 수 있을지 토론했다. 전문가들은 "연구부정은 과학은 진실이라는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라며 "사회 전체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라도 연구윤리 확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학계 전반적으로 연구윤리 해이가 심각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희종 교수=우리 사회의 무한경쟁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학계까지 반영됐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에서 두뇌한국21(BK21)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을 왕창 투자하고, 논문을 외국 학회지에 내라고 독려했다. 연구윤리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과만 요구하다 보니 각종 부정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학문도 올림픽처럼 돈을 투자해 노벨상을 받게 하겠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연구부정은 계속될 것이다.
박기범 연구위원=단기적인 성과 추구만으로 부정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실제 사례들을 보면 '과연 쫓겨서 그랬을까' 의심된다. 사실 범죄 없는 국가가 없듯이 연구부정은 개인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없어질 수는 없다. 원인을 따져보면 정량 평가·업적주의를 중시하는 구조적 측면, 승진ㆍ임용과 관련된 조직적 측면, 명예 욕심으로 인한 개인적 측면, 걸려도 처벌받지 않는 풍토 등 문화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문화적으로 변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구조ㆍ조직적 측면에서는 바뀐 게 거의 없다.
한상권 교수=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논문 표절 문제다. 병역 기피, 세금포탈, 위장전입과 함께 4대 비리로 꼽힌다. 이권을 추구하는 폴리페서, 비리를 눈감아주는 침묵의 카르텔이 문제다. 선진국에선 엄하게 처벌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보니 너도 나도 부정을 저지르는 심리가 있다. 19대 국회의원 중에도 표절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윤리지수가 높아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뿌리깊은 연구부정을 근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 교수=부정을 눈감아주는 동업자 의식을 깨기 위해선 학계 안팎에서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국가기관의 감시가 있어야 하고, 대학 내부의 자정도 중요하다. 교수 집단 스스로 연구윤리 강령을 만들고, 윤리 교육을 시키고, 이를 준수하는 대학은 인센티브를 주는 등 대학평가에도 반영해야 한다. 또 학위논문 표절의 경우 지도교수의 책임을 강화하고, 학회에 제출된 논문은 학회가 공동 책임지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
우 교수=연구윤리 문제는 연구자들의 평소 윤리의식과도 이어진다. 황우석 사건 이후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윤리교육을 하고 있는데 학부생에 대한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학부 학생들이 보고서를 베끼는 것부터 바뀌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연구부정에 대한 엄정한 징계와 처리를 정착시켜야 한다. 대학들이 체면 때문에 연구부정 사건이 있어도 유야무야 넘어가는데 대학 조직의 체질도 개선돼야 한다.
-문제는 연구부정이 드러나도 징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 학계에 자정 능력이 있는 것인가.
한 교수=최근 표절 사태를 보면서 아무도 표절당했다고 나서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객관적으로 표절한 상황은 있는데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지도교수와 학생 사이가 수직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학문 권력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박 연구위원=3~4년 전 관련 연구 때문에 전국 대학의 연구 부정행위 보고서 100건 정도를 봤다. 일부는 파면도 당연하겠다 싶었지만, 오히려 저런 징계까지 내려야 하나 싶은 사례도 있었다. 이 정도 부정〈?이 만한 징계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합의를 만드는 주체가 없다. 대학에서도 연구진실성위원회와 징계위원회의 역할이 나눠져 있어 그 사이에 괴리가 있다. 사안은 비슷한데 대학에 따라 징계 수위가 다르기도 하다. 대학이 부정사례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 사례 축적도 어렵다.
우 교수=드러난 부정이 제대로 처리가 안 되는 게 정말 문제다. 외국에선 부정이 발견되면 학계에 발을 못 붙이는데 우리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남고, 계속 논문을 낸다. 이런 사람들을 학계가 걸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안 한다.
박 연구위원=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학계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외국에는 과학자가 먼저 존재하고, 정부가 이들을 지원했는데 우리는 1960년대 정부가 주도적으로 과학기술자를 모아 육성했다. 학계 독립성이 떨어지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학회만 있을 뿐 학계가 없다.
우 교수=광우병 논란 때 일본 과학자들은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20개월 미만만 수입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오히려 전문가 집단이 정부 입장을 대변한다.
한 교수=역사 쪽은 좀 다르다. 지난해 역사교과서의 자유민주주의 용어 논쟁 때 역사학자들 상당수가 정부 결정에 반발해 사퇴했다. 역사학계의 자부심이다(웃음).
-논문을 쓰고, 심사하는 과정에서부터 부정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연구에 참여도 않고 이름만 올리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목소리를 취재과정에서 쉽게 접했다.
우 교수=생물학 분야에선 교수가 아이디어를 짜고 방향을 제시해 교신저자가 되고, 실험한 학생은 제1저자가 된다. 다만 중간의 공동저자 문제가 심각하다. 공동저자란 그 사람이 빠지면 실험이나 논문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건데 많은 교수들이 별 기여 없이 이름만 올린다. 인맥형성을 위한 봐주기다. 공동저자도 주저자 못지 않게 책임을 지게 하는 분위기가 이번 기회에 마련돼야 한다.
한 교수=학위논문도 지도교수가 책임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표절 논란이 불거지면 지도교수가 해명하도록 공동책임을 지워야 한다. 그러면 함부로 학위를 주지 못할 것이다. 정치인 논문은 대부분 지도교수와 부당거래라고 할 수 있다. 박사논문은 5명이 심사하는데 이 과정만 제대로 되면 표절하려 해도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본다. 박사학위 논문의 중요성을 학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박 연구위원=우리나라에는 그런 학위가 많다. 1년에 배출되는 박사가 1만명이 넘는데 그 중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이들의 논문 중 제대로 쓴 논문이 몇 개나 될까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연구윤리 확립이 우리 사회 전체에 왜 중요한지 말씀해 달라.
박 연구위원=연구윤리는 의학에서 시작돼 생명과학, 자연과학, 전체 과학으로 발전했는데 결국 '과학은 진실'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인데 그 자격은 엄격한 자기통제에서 나온다. 연구부정은 그 믿음을 깨는 것이며 잘못된 연구 결과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기 때문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우 교수=연구윤리 확립은 공정사회로 나아가는 근간이다. 연구부정은 불로소득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 학문윤리가 바로 서야 할 이유다.
한 교수=학문 윤리를 세우는 것은 연구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연구비 대부분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공공자금이기 때문에 학자로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사회적 신뢰 회복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박기범(44)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ㆍ박사, 2006년 과학기술부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정에 참여.
▲우희종(54)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서울대 수의학과 졸업, 도쿄대 생명약학협동과정 석ㆍ박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등 역임.
▲한상권(59)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박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 역임.
진행·정리=한준규기자 manbok@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사진=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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