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 밤골마을. 서울에 몇 군데 남지 않은 달동네 중 하나다. 40여년 전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정착한 마을은 물 맑고 밤나무 많아 살기 좋은 곳으로 통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낙후지역으로 전락했다. 2007년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뒤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곧 무너질 것 같은 낡은 가옥들이 즐비하고, 주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 처럼 무기력하다. 이런 마을에 최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작가 성남훈(49)씨가 사진전 하나를 열면서 생긴 작지 않은 변화다.
사진전 제목부터 주민들을 끌어당긴다. 동네이름과 같은‘밤골’이고, 마을 어귀 막걸리집이 전시 장소다. 10㎡ 밖에 안 되는 좁은 전시장 벽면엔 재개발을 앞둔 밤골마을 사진 32점이 걸렸다. 좁은 계곡 사이로 옹기종기 터를 잡은 오래된 가옥들, 구불거리는 골목길, 파리 날리는 구멍가게, 노인정 등 마을 구석구석에서 포착한 주민들의 일상이 사진에 녹아 있다. 18일 현장에서 만난 성씨는 “재개발을 앞둔 달동네를 기록한 여느 사진전과는 다르다”며 “사진 속 피사체들과의 소통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마을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셔터를 누른 이는 성씨가 주축이지만, 그를 중심으로 지난해 결성된 아마추어 사진작가 모임 ‘꿈꽃 팩토리’ 회원들도 있다. 22년간 세계를 누비며 유랑민들의 삶을 기록한 성씨의 제자들이다. 회사원, 간호사, 교사, 학생 등 다양한 직업에 연령도 20대부터 60대까지 폭넓다. 성씨는 “사진 공부도 같이하고 혼자서는 하기 힘든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재개발 현장은 원주민 정착율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잖아요. 재개발로 인한 공동체 붕괴가 두드러지는 현장을 렌즈에 담아 그 폭력성을 고발하자고 했는데, 제자들이 선뜻 동참하더군요.”때마침 한 TV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밤골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남은 미련 때문인지, 달리 갈 곳이 없어서인지 철거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성씨가 반드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재개발 무대였던 것이다.
사진이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꿈꽃 팩토리’는 봄비처럼 주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했다. “사진 자체보다는 사진에 담긴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동네 경로당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물이라도 샌다는 집이 있으면 함께 수리까지 했죠.” 성씨의 설명이다. 성씨는 특히 “그 과정에서 찍은 사진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얘기를 나눌 땐 한 동네 사람이 된 듯 했다”며 “전시 공간을 동네 사랑방이나 다름 없는 막걸리집으로 잡은 것도 사진을 통해 무너진 공동체를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인화된 사진이 막걸리집에 걸리던 날 동네엔 잔치가 열렸다. 사진의 주인공들과 사진작가들이 하나가 됐다. 성씨는 “누가 사진작가고 누가 피사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며 “사진 한 장을 두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했다.
“재개발이 이뤄지는 곳은 대개 공동체가 붕괴하고 인심은 흉흉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진전을 통해 아직 살맛 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깨쳤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성씨는 사진전에 만족하지 않고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진교실도 최근 열기 시작했다. “굴삭기 굉음에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뿔뿔이 흩어지겠죠. 이들의 시선으로 그들이 살던 마을을 기록하게 한다면, 그래서 재개발의 잔인함을 오래 기억하도록 한다면, 지금처럼 무차별적인 재개발은 줄겁니다.”
글ㆍ사진=손효숙기자 sh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