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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영화계, 구로사와·오즈만 있는 게 아니다

입력
2012.06.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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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화면에선 원초적인 에너지가 넘쳐났다. 살기 위한 욕망과 욕정으로 어둠 속에서 번득거리던 인광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부상당한 사무라이들을 약탈해 생계를 이어 가는 고부(姑婦)의 기이한 관계부터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이 한 사무라이를 만나 욕정을 해결하다 소유욕과 질투 때문에 파국에 다다르는 결말도 충격적이었다. '오니바바'(1964)에서 일본의 정신적 원형을 가늠할 수 있었고, 인간의 비루함을 새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섬뜩하면서도 다의적 메시지를 지닌 이 영화를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엑소시스트'를 만들 때 참조했다는 소문이 낭설로만 들리지 않는다.

'오니바바'의 신도 가네토(新藤兼人ㆍ1912~2012) 감독은 한국 대중에겐 아주 낯선 존재다. 하지만 일본영화계에선 얼마 전까진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다.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1951년 '애처이야기'를 발표하며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원자폭탄 투하 뒤의 참혹한 실상을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린 '원자폭탄의 아이들'(1952)과 어느 농부의 사계를 섬세하게 묘사한 '벌거벗은 섬'(1960)으로 세계 영화계의 눈길을 끌었다. 신도 감독은 실험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일본 사회의 모습을 담아낸 사회파 감독으로 꼽혀왔다.

무엇보다 그는 고령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감독으로 유명했다. 99세였던 지난해 신작 '한 장의 엽서'를 선보이며 건재를 과시했다. 반전 메시지를 담은 '한 장의 엽서'는 일본 영화전문지 키네마준포가 선정한 '2011년 일본영화 베스트10' 중 1위에 올랐다. 올해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돼 화제를 모았던 90세 알랭 레네의 노익장이 무색할 정도다. 2000년대에만 4편의 영화를 만든 신도 감독은 지난달 29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7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불사조라는 별명답다.

신도 감독의 영화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전이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1일까지 열린다. 영상자료원이 외국 감독의 타계에 맞춰 추모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니바바'와 '한 장의 엽서' 등 신도 감독의 대표작 5편과 그가 시나리오를 쓴 '겡카 엘레지' 등 2편이 관객을 기다린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등을 편애하던 영화 팬들이라면 일본영화의 진경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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