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낮, 평택 서남방 104㎞ 인근 해상. 10척의 전투함들이 구축함 문무대왕함(4,400톤)의 좌우로 날개를 펴듯 늘어섰다. 문무대왕함 갑판 위에는 최윤희 해군참모총장과 승조원 200여명, 고 윤영하 소령의 부친 윤두호(70)씨 등 전사자 유가족 11명이 흰 장갑을 끼고 서해바다를 응시했다. 잊혀져 가고 있는 제2 연평해전 10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고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불굴의 6용사 귀환훈련' 행사다.
전국이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여있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순찰중이던 참수리급(170톤) 해군고속정 357호는 북한 경비정(215톤)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신속한 응사로 북한 경비정의 선체를 대파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우리 해군도 정장(艇長)이던 윤영하 소령(당시 29세)를 비롯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크게 다치는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 이 희생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배가 침몰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패전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낮 12시 문무대왕함 갑판 위에서 조곡수인 송하성 일병과 김휘 상병이 장송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유가족들은 "(윤)영하야, (박)동혁아, (서)후원아!"라고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바다로 국화를 던지며 참던 울음을 터뜨렸다. 해상헌화가 끝나자 전사자들의 이름을 붙인 윤영하함, 한상국함, 조천형함, 황도현함, 서후원함, 박동혁함 등 6척의 유도탄 고속정(PKGㆍ450톤)들이 한 척 한 척씩 최고속력(시속 75㎞)으로 나아갔다. 유가족들은 "우리 아들들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고 찬사를 연발했다. 해군 관계자는 "출전에 앞서 아들들이 부모님께 신고를 하는 모습을 가정했다"며 "동해에서 작전을 하는 PKG 3척도 이날 훈련을 위해 하루 반이 걸려 서해로 기동했다"고 설명했다.
헌화식과 선상사열이 끝난 뒤 북한 경비정이 북방 한계선(NLL)을 월선한 상황을 가정한 훈련이 이어졌다. PKG 편대 서쪽 1.4㎞ 지점에 적 경비정이 접근하자 KF16 공군기 2대가 출동, 기총소사를 했다. 적 경비정이 공군기의 기총소사와 "퇴각하라"는 경고방송을 무시하자, 6척의 PKG는 주포인 76㎜포 36발과 부포인 40㎜포 180발을 퍼부었고 경비정은 퇴각했다. 적 경비정 퇴각 이후 적 잠수함이 PKG 편대에 접근하자 이를 호위하던 초계함 3척이 일제히 폭뢰를 투하, 잠수함을 수장시켰다.
2차 연평해전 당시 고속정357호에서 통신장으로 복무하다 30여 개의 파편이 하반신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던 이철규(36ㆍ공군작전사령본부 파견) 해군 상사는 "아직도 천둥번개가 치면, 전우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고통스럽다"며 "먼저 간 여섯 전사들의 한을 풀기 위해 지금도 해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2차 연평해전 당시 적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처장으로 근무했던 최윤희 참모총장은 이날 유족들과의 만나 해전이 벌어지기 사흘 전부터 북한 경비정이 NLL을 2~3마일씩 월선했지만 당시 긴장을 조성하지 말라는 정부 내 분위기 때문에 NLL 북쪽까지 추격하지 못했다며 6명의 전우를 잃은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을 일으킨 북한경비정 684호가 교전 이틀 전 상급부대인 8전대에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특수정보(SI)를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
평택=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