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1954년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창간한 이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전 분야에서 수많은 특종기사를 쏟아냈다. 6ㆍ25전란 직후 혼란기에 태동해 지령 2만호를 내는 동안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장면마다 언제나 앞장서 있었으며,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는 데 어느 언론보다 투철했다. 허위와 맞서는 데 꺾이지 않는 기개를 발휘했지만 진한 휴머니즘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특종보도는 사실의 신성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고 춘추필법 정정당당 불편부당의 창간 사시가 바탕이 됐다.
전두환·최시중… 권력 비리마다 최초 보도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올 1월 27일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이 제가 떠나야 할 때"라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최 전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최고 실세. 하지만 그도 한국일보의 감시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한국일보는 1월 3일 김학인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이사장이 EBS 이사 선임 로비를 위해 최 전 위원장 측에 억대의 금품을 건넸다는 의혹을 처음 폭로했다. 최 전 위원장은 파이시티 개발사업 인허가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4월 30일 구속됐다.
전통적으로 사건ㆍ탐사보도에 강했던 한국일보는 권력형 부정ㆍ부패를 감시하고 파헤치는 워치독 역할에 충실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진승현ㆍ이용호ㆍ최규선ㆍ윤창렬 게이트 등의 연속 특종은 한국일보의 자랑이다. 88년 새마을 비리 수사 도중 전경환씨의 일본 도피성 출국, 2003년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이 수백억원대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양길승 청와대 부속실장 향응 비리 특종도 권력비리 보도에 가감이 없었던 한국일보의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대기업도 성역 없다… 축소 수사까지 추적
2003년 2월 19일자 SK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 폭로 보도는 자본 권력을 대하는 한국일보의 기자정신을 잘 보여준다. 당시 검찰이 압수한, SK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출자총액제한제 시행에 대비해 작성한 비밀보고서에는 SK그룹 지배구조 개선과정에 최 회장이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에 직접 개입한 정황을 보여줬고, SK글로벌의 1조원대 분식회계 사건(2003년 2월 27일자 보도)을 밝혀내는 단초가 됐다. 당시 검찰 수사를 통해 SK글로벌이 2001회계연도 이전부터 부채를 제대로 회계에 반영하지 않아 1조4,000억원 정도의 빚이 없는 것처럼 장부를 조작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이 보도는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계기가 됐다.
주가 조작 혐의로 수사를 받던 김준홍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의 자금 중 일부가 SK그룹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도 2011년 5월 27일자 한국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폭로됐다. 이후 검찰은 SK그룹 최태원 회장 등이 다른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해 선물ㆍ옵션 투자금으로 사용한 사실이 밝혀냈다.
2009년 10월 7일자 효성그룹 비리 축소 수사 의혹 보도는 검찰의 추가 수사를 이끌어 냈다. 한국일보는 2007년 대검이 효성그룹이 10가지 위법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리고도 제대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은 사실을 보도했다.
훈 할머니·성덕 바우만… 감동의 사연들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
경남 진동에서 태어나 18세 때인 1942년 부산항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뒤 캄보디아에 머물던 훈 할머니는 가족을 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97년 외신을 통해 훈 할머니 소식이 보도된 직후 한국일보는 6월 14일 첫 보도와 함께 현지에 기자를 파견, 76일간 캄보디아 프놈펜과 국내를 샅샅이 훑는 취재를 펼치며 수많은 특종을 쏟아냈다. 외무부는 훈 할머니가 5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나섰고, 대검찰청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 고향과 가족, 한국 이름 '이남이'까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범국민적 골수기증 운동을 이끌어 냈던 한인 입양아 성덕 바우만씨의 사연도 95년 11월 22일 한국일보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당시 21살로 미국 공군사관학교 4학년이던 바우만씨는 이듬해 임관을 앞두고 있었으나, 만성골수성백혈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미 텍사스주 군암치료전문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다. 한국일보는 이후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안타까운 사연을 매일 보도 했고, 전 국민적인 골수기증 운동의 불씨를 당겨 96년 2월2일 유전자형이 같은 골수 기증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이후 골수 기증ㆍ치료비 기부 운동이 들풀처럼 일어나 많은 백혈병 환자들이 새 생명을 얻는 계기가 됐다.
"황우석 줄기세포 없다" 사회적 논란 정리
2004년 황우석 당시 서울대 교수 연구팀이 "인간의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하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이듬해 환자 체세포를 복제한 맞춤형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황 교수는 '국민 영웅'이 됐다. 하지만 그 해 11월 MBC PD수첩이 배아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의혹을 방송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일부 언론은 황 박사 측 주장만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편파 보도를 남발했다. 한국일보는 2005년 12월 6일자에 젊은 생명과학자들이 제기한 사진중복 의혹을 보도하는 등 논문이 허위라는 근거를 제시했고, 12월 8일자 '서울대 생명과학 소장파 교수들, 논문 검증 鄭 총장에 건의' 등 단독보도를 통해 서울대의 논문 검증 결정을 이끌어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결국 이듬해 1월 "복제배아 줄기세포는 없고 논문은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황교수의 논문조작 혐의는 1, 2심 모두 유죄가 선고됐고 현재 대법원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DJ·JP 전격 회동… 역사를 다시 쓴 보도
15대 대통령선거를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 3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야권 단일화 합의문'에 최종 서명한 김대중(DJ)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DJP 단일화로 첫 수평적 정권교체 발판이 놓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상 첫 야권 단일화는 앞서 한국일보 10월 28일자 '김대중-김종필씨 전격 회동' 특종기사를 통해 먼저 알려졌다. 한국일보는 김대중 총재가 김종필 총재의 서울 청구동 자택을 비밀리에 방문해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보도했다. 김대중 총재가 단일후보가 되고 김종필 총재가 조각권을 가진 공동 정권의 국무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합의문 내용도 전했다. 결국 97년 대선에서 DJP연대를 앞세운 김대중 후보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1979년 8월 9일 가발 봉제업체 YH무역 생산직 여성근로자 170여명이 사측의 폐업공고에 반발,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시작된 YH사건도 한국일보만이 11일과 12일자 1면에 연 이틀 보도했다. YH사건은 김영삼 당시 신민당 의원의 국회의원직 제명을 불러왔고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문무대왕릉 발견… 세상에 처음 알린 쾌거
1967년 5월 16일자 '경북 월성군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은 문무대왕릉'이라는 제목의 특종 기사는 문무대왕릉의 존재를 확인, 세상에 처음 알린 쾌거다. 한국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벌인 '신라 학술 조사사업'의 성과였다.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는 문무대왕이 수장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을 뿐 릉의 위치 등은 나와있지 않았다.
조사단은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둘레 200m 정도의 바위 섬인 대왕암을 조사해 섬 가운데서 매장 당시 쓰인 것으로 보인 거북모양의 돌 등을 발견한 뒤, 대왕암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릉임을 공식 확인했다.
한국일보는 64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신라시대 다섯 명산(신라五岳)에 대한 학술조사에 나서 이듬해 태백산 자락에서 동양 최대의 반가사유석불(半跏思惟石佛)을 발견하는 등 국보급을 포함, 모두 147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새로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미지의 우리 역사를 발굴ㆍ복원하는 작업은 80년대 '재발굴-한국독립운동사'로 이어졌다. 창간 32주년인 86년 6월 9일부터 89년 8월 27일까지 3년간 140회가 연재된 이 기획물에서는 한국 언론사 최초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한 본격 조명이 이뤄졌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