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비공인 감정평가서로 담보 대상 부동산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대출금액을 자의적으로 결정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데도 금융당국은 은행이 담보물 가치평가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대폭 늘려주는 등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17일 한국감정평가협회에 따르면 A은행의 경우 정식 감정서가 아닌 '탁상감정평가서'는 공인 감정기관에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악용해, 대출연장 때 비공인 탁상감정평가서에 은행 자체 분석을 곁들여 마치 정식 감정평가서인 것처럼 활용 대출금액을 결정해왔다. 감정평가협회 관계자는 "이 은행이 최근 2년간(2010~2011년) 담보물건 18만3,000건에 대해 정식감정평가서 없이 탁상감정서로 대출액을 결정했다"고 폭로했다. 게다가 은행은 감정평가법인 3곳에 이 같은 사실을 외부에 알려질 경우 "더 이상 감정평가 업무를 의뢰하지 않겠다"는 협박성 문자까지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문서탁상감정은 감정평가사가 현장방문 없이 서류 검토만으로 가치를 예측해 은행에 제공하는 서비스로, 은행은 이를 바탕으로 대출 여부를 판단한 뒤 정식으로 감정 의뢰를 해야 한다. 앞서 감정평가협회가 문서 탁상자문 서비스를 전면 중단한다고 하자, 은행연합회는 "은행들이 탁상감정서를 대출참고자료로만 활용하고 있다"고 지난 15일 밝혔는데, 이 같은 해명이 부분적으로 거짓인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B은행의 일부 지점은 다수의 감정평가사들의 경쟁을 유도한 뒤 자기 입맛에 맞는 평가서를 고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은행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감정평가사들이 감정평가를 하더라도 대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수수료를 주지 않는다는 협약을 맺어 사실상 감정평가시 은행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해왔다.
은행권의 감정평가 소홀은 지난해 7월 대법원이 담보설정비용을 고객이 아닌 은행이 부담하도록 판결하면서부터 가속화해 왔다. 그런데도 감독당국은 지난달 '은행업 감독규정'을 개정하며 예상 감정가액이 20억원 이하일 경우 등의 예외규정을 만들어 은행들이 자체 감정평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20억원 이하의 부동산 담보물건이 감정평가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사실상 은행의 자체 감정을 전면 허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담보물건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많은데다, 은행에도 감정평가를 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업무를 맡게 돼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부동산 하락기에는 담보가치를 낮추고, 상승기에는 높이는 경향이 많아 대출 받으려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뿐 아니라 부동산 경기 등락폭을 더 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감정평가 업무를 은행이 자체적으로 한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며 "선진국에서는 감정평가 업무를 독립적으로 집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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