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올이 굵고 성긴 마포 뒤편에서 물감을 밀어낸다. 그러면 묽은 물감은 앞면으로 밀려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흘러내린다. 때로 그는 밀려온 마른 물감 덩어리를 앞면에서 강하게 눌러낸다. 마포 캔버스 위에 압착된 물감 덩어리는 둥글납작하게 다진 메주처럼 보인다.
가늘고 긴 여러 개의 나무판 사이에 접착제 대신 물감을 넣어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나무판 사이로 밀려 나온 물감은 마치 물결처럼 굴곡을 이룬다. 거대한 규모에 작품 앞에서 관객은 압도되고 만다. 동서양 화단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추상회화의 새 장을 열어온 하종현(77) 화백의 '접합' 연작이다.
14일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이들 작품에서 자연을 본다고 했다. "비정형적 이미지는 자연과 가장 닮아 있지요. 일부러 방식을 단순하게 합니다. 최대한 장식을 덜어내면서 예술의 정수만 남기려고 합니다."
그의 50여 년 화업은 실험과 파격으로 응축된다. 특히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엄혹한 언론검열과 예술에의 억압을 은유한 작품은 여전히 미술계에 회자되고 있다. 이미 발행된 신문과 인쇄 이전의 빈 신문용지를 양쪽으로 쌓아놓은 '대위(對位, 1971)와 캔버스를 뒤집어 철조망으로 옭아맨 '작품73'(1973)이 그것이다.
"당시 신문엔 빈칸이 많았어요. 정부에 검열당해 글씨가 지워진 채로 인쇄가 된 거죠. '작품73'은 완성 작품 뒷면에 철조망을 둘렀으니, 스스로를 가두는 작업이었죠. 당시의 시대상황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1960년대 앵포르멜(Informel·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미적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시도한 예술운동) 시기부터 아방가르드 시기와 '접합'연작을 거쳐 현재 '이후접합'연작을 이어오고 있는 하종현 화백. 그의 50여 년 화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회고전이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월 15일 개막했다. 전시장엔 시대별 대표작 85점이 전시됐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12년 작품까지 다양한 변화 중에도 일관된 성격이 읽힌다. 바로 물질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관심과 실험이다. 앵포르멜 시기부터 그는 캔버스를 불로 그을리거나 밧줄을 이어 붙이거나 돗자리처럼 엮어내는 등의 오브제 작업을 통해 개개의 물질을 실험해왔다. 35년 남짓 이어온 '접합' 연작과 서울특별시립미술관장(2001~2006년)을 사직한 후 3년 전부터 매달려온 '이후접합' 연작은 물감과 마포, 나무에 집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포의 올과 물감의 물성을 중시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인위성을 최대한 배제해 마포와 물감, 작가의 상상력이 함께 공존하려는 생각을 가졌지요. 여기에 색채를 더해낸 것이 최근의 '이후접합'입니다. 제 화업에서 그동안 무엇이 빠졌나 생각해보니 색이더군요. 그 후론 원 없이 색을 사용하고 있지요."
이번 전시에서 첫선을 보이는 '이후접합' 연작에선 형형한 원색의 파도가 대형 캔버스에서 넘실댄다. 색채로 가득한 이들 작품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그는 "만선(滿船)의 기쁨"이라 표현했다.
추상회화에서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작품은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내 작품을 사람들이 알만하면 화풍이 바뀌니 누가 사겠느냐고요. 허허."
팔리지 않아도 실험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예술가에게서 예술은 종교 같은 겁니다.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긴 안목을 가져야 하죠. 나이를 먹어도 제 화풍을 변화시켜 나갈 겁니다. 궁극적으로 예술에는 완성이 없으니까요." 전시는 8월 12일까지. (02)2188-6000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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