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6월 9일 창간 이래 지령 2만호를 맞는 동안 한국일보가 취재원, 기고자, 독자로서 인연을 맺은 이들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국일보' 하면 퍼뜩 떠오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소설가 황석영(69)씨는 그 중 첫손에 꼽을 만하다. 특히 1974년 서른두 살 신예였던 그가 장장 10년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한 대하소설 은 작가를 일약 한국 대표 작가의 반열에 올린 출세작이자, 그와 한국일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징표다. 이후 연재로 이어진 인연은 황씨가 등단 50년을 기념한 야심작 '여울물 소리'를 지난 4월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며 더욱 두터워졌다.
지난 7일 오후 경기 일산 자택을 찾았을 때도 황씨는 '여울물 소리' 집필에 한창이었다. 서재 책상에는 컴퓨터 자판 양쪽에 조선시대 고지도가 여러 점 펼쳐져 있었다. "이번 소설은 사료에 집착하지 않을 참이지만 리얼리티는 살려야죠." 소설 배경이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로 넘어가면서 복식, 화폐 등 원고 쓸 때 챙겨야 할 변화상을 설명하는 칠순 작가에게선 뜨거운 창작열과 노고가 함께 느껴졌다. 연재에 돌입한 이후 운동할 시간도 줄이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그이지만 한국일보 지령 2만호 소식에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한결같은 비판적 중도 신문
황씨는 "한국일보가 지령 2만호가 되도록 변치 않고 논지를 지켜냈다는 점, 신문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도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밝히는 기사를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며 축하했다. 이 덕담을 시작으로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일보가 창간 이래 58년 간 견지해온 중도와 비판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일보는 변함없이 중도 노선을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영 사주가 박정희 정권 각료(1964~67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였을 때조차 정권에 대단히 비판적이고 중립적이었죠. 유신 시대가 되면서 비판적 신문들이 모두 친정부적, 보수적으로 바뀔 때도 한국일보만큼은 중립성을 지켜냈습니다."
황씨는 한국사회에 중도 진영이 척박하다고 보고 큰 우려를 표명해왔다. 2007년 대선 시즌에는 "새가 좌우 날개로 난다고 했을 때 좌와 우는 그저 기능이다. 양자가 화합해 이념의 시대를 넘어 프로페셔널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며 중도론을 천명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첨예한 시기에 그의 발언은 당시 여권의 특정 후보를 두둔하는 발언으로 치부됐다.
강한 중도지가 필요하다
또 한 번의 대선을 앞둔 지금, 황씨의 문제의식은 여전하다. "좌파는 우파를 파시즘으로, 우파는 좌파를 극좌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진영 논리에는 중간지대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네를 탈 때 진폭이 너무 크면 불안하니 진폭을 좀 줄이자는 게 내가 말하는 중도화예요. 서로 상대방 쪽으로 수평이동을 하자는 거죠. 그렇게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형성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중도지의 역할을 재차 강조했다.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 장기 체류하며 선진사회의 언론 환경을 몸소 체감한 그는 "현 상황과 정부에 비판적이면서도 여론의 큰 흐름을 아우르는 신문"을 중도지로 규정하며 모범 사례로 미국 뉴욕타임스, 프랑스 르몽드, 일본 아사히신문을 꼽았다. 이어 이념적 진영 논리가 신문 시장까지 좌지우지하는 한국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신문이 장사가 안 된다는 게 말이 안돼요. 그렇게까지 이념적으로 양극화, 진영화된 신문들이 인기 있는 현실은 정말 문제입니다."
'황구라'의 요람 한국일보
연재 때부터 쳐도 40년 가까운 인연이다. 관계가 오래니 애증도 곡절도 있을 터인데 황씨는 손사래 치며 힘주어 말했다. "한국일보는 나를 정말 식구처럼, 한결같이 대했습니다." 웃으며 덧붙인다. "원고 갖고 내가 속을 썩인 적은 있지만요." 연재 때 이야기다.
연재는 황씨가 전남 해남, 광주, 제주에 머물며 민중문화운동을 펼쳤던 10년(1976~85년)과 대부분 겹친다. 공사다망한 남도의 작가와 연재가 펑크날까 노심초사하는 서울 신문사 간에 미운 정 고운 정 든 사연은 지금도 문단과 언론계의 단골 화제다. 황씨가 철도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초면의 상경객을 붙잡고 급한 원고 배달을 부탁하거나, 기자에게 전화로 당일 원고를 구술한 일은 부지기수라 별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황씨가 연락이라도 끊으면 문화부 기자들이 텅빈 연재란에 지난 줄거리를 채워 넣거나 작가를 찾으러 전라도 출장을 갔다. "연재 후반부에는 김훈(소설가)이 고생 좀 했죠. 지금도 같이 술 먹으면 그때 원수를 갚으려고 대들어요."(웃음) 기자들은 그런 황씨를 '황웬수'라 부르다가도 장장하게 연재를 이어가는 괴력에 '황구라'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름만큼 자주 불리는 그의 별명이 그렇게 탄생했다.
내게는 식구 같은 신문
군사정권이 또 다른 군사정권으로 대체되면서 황씨와 권력의 관계는 극도로 불편해졌다. 1979년 10ㆍ26 직후 계엄법을 위반해 군 감방에 갇혔고,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엔 수배자가 되어 서울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도 자연히 장기 휴재에 들어갔다.
범법자 신세가 됐지만 황씨에 대한 한국일보의 호의는 변함없었다. 그가 인터뷰 중 다시금 깊이 고마워한 일은 이렇다. "광주항쟁 후 도망 다니면서 1년 반쯤 연재를 쉬었어요. 나 말고 다른 수배자 여덟 명이 수녀원, 가정집 등 곳곳에 숨었습니다. 이 사람들 생활비가 필요해서 내가 한국일보에 석 달 치 원고료를 미리 달라고 했어요. 언제 연재를 재개할지도 모르면서 무리한 부탁을 한 건데 선뜻 돈을 내주더군요."
방북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마친 뒤 한국일보에 을 연재(2000년 10월~2001년 3월)할 수 있었던 데에도 감사를 표했다. "은 옥중에서 구상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신문 연재용으로는 거리가 있는 본격 문예물이고, 10년 넘게 소설을 쓰지 못했던 나로서는 부담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장명수 사장(현 이화학당 이사장)이 '황석영 소설이면 상관없다'며 흔쾌히 지면을 내주었습니다. 문학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한국일보와 함께 한 셈입니다."
신문은 진정 위기인가
연재 작가로서 뉴스메이커로서 평생 신문과 함께 해온 황씨는 "신문이 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 변화를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인터넷ㆍ모바일 매체가 득세하면서 신문을 비롯한 인쇄 매체 전반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매체라는 형식에서 시작된 위기가 사회적 정론으로서 신문 권위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뉴스 소비자들은 이제 인터넷에서 얻은 생생하고 풍성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합니다. 신문의 관점을 불신하는 것과 맞물려 신문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낮아지는 것이죠."
하지만 황씨는 신문의 미래를 결코 어둡게 보지 않았다. 신문이 보유하고 수집하는 정보가 양과 질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경쟁력은 콘텐츠에 달려 있습니다. 매체는 여건만 된다면 얼마든지 갈아탈 수 있으니까요." '신문지'로서 신문은 위기를 맞았지만 '새로운 정보(新聞)'로서 신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뜻이다.
더 가볍고 더 깊어져라
황씨는 신문의 '환골탈태'를 주문했다. 종이 신문 외에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로 매체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문사의 종편 운영을 "과잉"이라고 진단했다. 2000년대 초반 케이블방송인 시민방송(RTV) 개국에 참여하고, 파리 공장지대의 창고에서 청취자 800만 명의 라디오 해적방송과 인터뷰한 경험 등이 근거다. "대세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컴퓨터로구나, 몸(매체)을 가볍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종편은 돈이 많이 드는데다 다채널 시대에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힘듭니다. 신문사들이 관성적으로 뛰어든 것 같아요."
종이 신문 틀에서 벗어나 정보 성격과 독자 수요에 맞춰 기사 형식을 다양화하는 것도 황씨가 주문하는 환골탈태다. "기존 방식대로 복잡한 정보를 잘 갈무리해서 내놓되 필요하다면 분량에 구애 받지 말고 심도 있는 기사를 내놔야 합니다. 차별화된 관점을 갖고 전문성 있는 분석을 할 때 권위지로서 독자의 관심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이수연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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