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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령 2만호 특집/ 혁신의 서막 열다, 창간일 6과 9는 오뚝이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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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령 2만호 특집/ 혁신의 서막 열다, 창간일 6과 9는 오뚝이 상징

입력
2012.06.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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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한국일보는 1954년 6월 9일 태어났다. 이날이 길일이기도 했지만 숫자 6과 9를 포개면 태극무늬가 된다는 점, 6과 9가 불퇴전의 기상을 담은 오뚝이 형상이라는 점이 택일의 이유가 됐다. 창간 발행인 백상 장기영(1916~1977)은 "한국일보의 정신은 칠전팔기의 정신이다. 창간일의 6과 9, 그것은 쓰러지면 또 일어나는 오뚝이와 같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창간호엔 혁신적인 시도가 많았다. 제호부터 파격이었다. 한반도 모양의 흰 배경에 한글로 제호를 쓴 이는 당시 이화여전 교사이자 서예가로 활동한 이미경이었다. 보수적 언론계에서 문패나 다름없는 제호의 글씨를 여성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두 면에 불과했던 당시 신문에 두 개의 사설을 실은 것도 획기적이었다. 하나는 정치 현안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제목을 단, 불편부당의 사시(社是)를 밝힌 창간 사설이었다.

짤막한 글에 시대상을 담은 1단 칼럼 '지평선'도 새로운 시도였다. 이 칼럼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면에는 염상섭의 소설 이 16일부터 연재된다는 사고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어 당시 신문 소설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머리기사는 제3대 민의원 개원에 관한 것이었다. "五, 卄 選擧에 依하여 二百三名으로 構成되는 第三期 民議院은…" 스물 '입(卄)'자 같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가 포함돼 있다. 1면에서 사건의 내용을 전하고 2면에 이에 대한 해설 기사를 실었다. 머리기사 아래에는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제네바 회의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대중적 상업지를 표방한 한국일보 창간호는 지면의 3분의 1 이상을 광고로 채웠다. 모두 11건의 광고가 실렸는데 가장 큰 지면을 차지한 것이 '청춘'이라는 잡지 광고다. 이밖에 외자관리청의 산업용 철강재 경매 공고, 한국산업은행 남대문지점 이전 복귀, 해태캬라멜의 경품 광고 등이 게재됐다.

창간호의 한 부 가격은 10환, 한 달 구독료는 200환이었다. 2면 하단에 당시의 생필품 물가가 소개돼 있어 신문의 가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등급 쌀 한 말에 800환, 보리쌀 한 말 300환, 돼지고기 한 근 200환, 달걀 한 꾸러미(10개) 220환이었다고 한다.

신문 용지의 수명은 약 30년에 불과하다. 지금 창간호를 꼼꼼히 읽어볼 수 있는 것은 2009~2010년 진행된 복원 작업 덕분이다. 심하게 부식된 창간호의 축쇄판과 마이크로 필름을 토대로 훼손된 활자를 일일이 대조해 사라진 글자를 새겨 넣고, 원본 필름을 찾아 사진을 당시 모습대로 배열하는 작업이었다.

복원 작업엔 창간호 한글화(독음본 제작)도 포함돼 있었다. 한자와 1950년대 어휘에 익숙지 않은 한글세대에게 한국일보의 창간 정신을 전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달라진 표현과 표기법은 현재에 맞게 고쳤다. 한글화 작업을 통해 복원된 한국일보의 창간 사설엔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정신'이 담겨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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