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씨앗/
스펜서 웰스 지음ㆍ김한영 옮김 / 을유문화사 발행ㆍ315쪽ㆍ1만5000원
미국 인류학자 로렌스 에인절이 1980년대 중반 발표한 논문에는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이행한 이후 인간의 건강상태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지중해 동부 지역의 유골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 따르면 구석기(기원전 3만년~9,000년)의 남성의 신장은 177㎝ 여성은 166.6㎝였다. 이 수렵채집인들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35.4세, 여성이 30.0세다.
하지만 농경과 가축 사육을 시작해 한자리에 정착한 신석기 초기(기원전 7,000~5,000년)의 남녀 신장은 각각 169.6㎝, 155.4㎝였다. 수명도 33.6세, 29.8세로 먹고 살기 더 어려웠을 수렵채집인보다 줄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인간의 평균 수명이 구석기 시대를 확실하게 뛰어 넘는 것은 20세기에나 와서다. 최소한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수렵채집인들은 농경 초기 사람들에 비해 20% 정도는 더 나은 상황이었다.
농경의 시작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류의 문명이 태동하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자연을 무한 약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불어난 인간 집단 안에서는 계급이 생겨났고 영토와 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별로 염려하지 않던 전염병이 한꺼번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인류학자이며 유전학자인 미 코넬대 교수인 저자가 쓴 <판도라의 씨앗> 은 수렵채집 시대를 끝내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고고인류학의 발굴 성과와 유전학 지식을 교차해 가며 농업문명으로 인류가 자초한 '불행'이 무엇인지를 꼬집고 있다. 판도라의>
정착 농업의 시작은 마지막 빙하기 이후 닥친 '영거드리아스기'라는 지구 한랭화 현상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야생 곡식이 늘어 풍족하고 인구도 늘었던 이 시기에 갑자기 닥친 기후 변화를 견뎌내기 위해 인간은 농사를 생각해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밀, 보리)과 중국(쌀), 중앙아메리카(옥수수)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인류를 배고픔에서 구제할 식물들이 처음 재배돼 세계로 퍼져 나갔다.
1만년 전의 이 변화는 인류사의 '빅뱅'과도 같은, 당시 수백만에 불과했던 인류를 60억이 넘는 '폭발'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자연을 그냥 식량 수확의 장소로 이용하는, 그래서 인간 자신도 그냥 자연의 일부로 남는 게 아니라, 자연을 이용해 자신의 식량창고를 만들기 시작한 때이다.
정착 농업의 시작으로 '풍요'를 얻었지만 인류는, 낮은 칼로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환경에 더 잘 적응했던 수렵채집 시기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비만과 당뇨라는 병을 숙명처럼 안게 되었다. 구석기 최대의 사인은 사냥을 나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이른바 외상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하며 대규모로 모여 살고, 가축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전염성이 높은 많은 질병들이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항생제가 나와 유행병의 방패막이를 했지만 이어 암, 당뇨병, 고혈압, 뇌졸중 같은 만성질환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의미한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는 '인간이 속한 모든 종류의 자연집단의 크기와 유사한 150명 정도'라는 연구를 인용하며, 저자는 농경사회 이후 인류는 늘어난 인구 때문에 너무 큰 사회적 자극 속에서 스트레스를 겪으며 산다고 말한다. 2020년께 정신질환이 두 번째로 중요한 장애 및 사망원인이 될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 전망과 맞아떨어진다.
그가 이처럼 1만년 농경사회의 변화 과정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되짚어보는 것은 '수렵채집인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우리의 먼 조상에게서 무언가 배울 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정착 생활 이후 인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해야 하고, 더 많을 것을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원해야 한다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농업과 함께 인류는 수렵채집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큰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게 됐지만, 그 추진력의 뒤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욕심을 줄일 때에야 기후 변화의 문제들과 타협할 수 있고 유전공학 같은 강력한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최선의 방법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총, 균, 쇠> 로 유명한 미국 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 책을 두고 "앞으로 50년 안에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미리 경고하기 위해 지난 1만년간의 인간 역사를 탐구"했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총,>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