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통은 꾸벅이며 졸고 있었고 서일수는 곰방대를 내어 담배 한 죽 피우고 있었다. 그가 보아하니 콧수염을 기른 자가 접의 우두머리인 듯 보였는데 두리번거리더니 일행의 망태기에 손을 넣어 호리병을 꺼내더니 꿀꺽이며 몇 모금 마셨다. 서일수가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
여보, 어찌 그 좋은 걸 혼자만 자신단 말요?
일 끝나고 열 잔 내신다면 드리리다.
그가 씩 웃으며 호리병을 내미는데 서일수가 받아 냄새를 맡아보니 이강주가 틀림없었다.
허어 이게 얼마만인가, 입 부르트겠군!
그게 바로 이강주라오.
서일수도 호리병째로 들어 몇 모금을 꿀꺽이며 마셨다. 삼월 중순이라 하나 새벽이라 제법 한기가 느껴지더니 독주가 넘어가자 아랫배에 뜨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마시다가 통성명을 하는데 역시 그는 훈련도감의 포수 별장이었다. 장교는 못 되어도 그를 보좌하여 병졸 수십 명을 통솔하니 콧수염을 장하게 기를 만했던 것이다. 흥인지문 밖 왕십리에 산다는데 나이는 서른이고 이름이 김만복이라 했다. 서일수도 옆에서 지켜보던 신통이도 그의 호탕함이 마음에 들었다. 뒤늦게 다른 선비 두 사람이 자신의 접꾼들 여섯 명과 당도하니 이제 접꾼만 열 명에 서수 대작도 네 사람이나 되었다. 일행은 지전을 나와 누렁다리를 건너 함춘원과 창덕궁의 돌담 사이로 뚫린 길로 들어섰는데 접꾼을 거느린 거자들이 새벽의 어둠 속에서 꾸역꾸역 몰려가고 있었다. 어둠 가운데 접꾼들이 밝힌 사초롱과 조족등 불빛이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가까워질수록 행렬은 더욱 빽빽해져서 길 양쪽 창경궁과 함춘원의 담장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군중이 몰려 있었다. 앞장섰던 만복이 일행을 함춘원 담장 아래로 이끌더니 그의 수하에게 조용히 일렀다.
길을 열어라.
어깨가 떡 벌어진 두 사람이 앞에 나서더니 다짜고짜 담장의 왼쪽으로 작대기를 휘두르면서 외쳤다.
나으리 행차시다. 썩 물렀거라!
사람들이 별수 없이 길 가운데 쪽으로 밀려나면서 담 옆으로 길이 생겼고 우락부락한 그들의 서슬에 뭐라고 나서는 자들이 없었다. 홍화문 가까이에 이르자 대문 앞은 그래도 너른 공터여서 낫겠거니 했지만 밀고 당기고 하면서 줄지은 사람들이 앞뒤로 몸을 붙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들이 헤치고 나가려는데 앞에서 누군가 험상궂은 자들이 오히려 가로막으며 나섰다.
나으리란 봄철 지난 개나리냐?
이쪽도 저쪽도 모두 사초롱을 들고 있어 서로 비춰 보며 고함을 지르는 판이더니 만복이가 상대방의 얼굴을 살피고는 외쳤다.
나여 나. 이 사람들 장사 첨 해봤나? 곁문으로 가야지.
어, 자네여? 홍화문은 틀린 것 같으이. 그리로 감세.
하더니 이들은 평소에 안면이 있던지 다른 접꾼 패와 합대하여 인파를 헤치고 홍화문 앞을 지났다. 그쯤부터는 왼쪽이 여전히 창경궁 담이었지만 오른쪽은 경모궁이었는데 두 담장 사이의 거리가 다소 한산해졌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중이었다. 홍화문 북쪽 방향으로 곁문이 셋이나 더 있었는데 맨 끝의 문묘 앞의 곁문인 통화문은 담장이 휘돌아간 끝이라서 물정 모르는 이들은 거기에 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곳이었다. 전수사 물건들을 궁에 들이거나 민가의 반빗아치들이 드나드는 문이었는데 거기까지 이 같은 날은 거자의 통행을 허락하고 있었다. 기역자로 꺾인 모퉁이에 당도하니 그들 접이 합한 이십여 명 외에 한 패거리가 더 있을 뿐이었다. 활짝 열린 문 옆에 수직 군사 한 쌍이 물러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아, 다들 좀 뛰십시다!
만복이 구보하면서 앞장서 나아갔고 선비들은 허우적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이 과장인 영화당 너른 마당에 당도하자, 이미 새끼줄 그물을 쳐둔 앞자리에는 많은 패가 들어와 담장 같은 장막을 치고 자기 패거리와 임의로 약속된 접의 이름을 크게 먹으로 쓴 사초롱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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