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전방위' 사찰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이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의 외장하드 등에서 확보한 500건의 사찰 자료에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이름까지 등장했다. 검찰은 이들에 대한 사찰이 실제로 벌어졌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대부분 단순 동향파악 수준에 불과해 사법처리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불법사찰 재수사팀은 지원관실의 사찰 사건 500건에 대해 수사한 결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이 경북 칠곡군수 등에 대해 불법으로 사찰을 지시ㆍ실행한 3건만 기소하고 나머지 497건에 대해서는 사법처리하지 않았다고 13일 밝혔다.
검찰은 500건 중 199건에 대해서는 지원관실의 적법한 감찰활동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인터넷 등에서 유포되는 소문이나 기사를 확인하는 차원의 단순 동향파악 활동이 111건에 달한 것으로 파악했다. 사찰이 벌어졌으나 구체적인 피해 사실이 없어 처벌하지 않은 사례는 105건, 명단에 이름만 기록된 경우는 85건이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사법처리한 3건은 적법한 범위에서 사찰이 시작됐지만 조치가 이뤄진 이후 부당한 압력이 행사돼 직권남용 혐의 등을 적용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이다. 행정부 조직이 사법부 수장에 대해 사찰을 벌인 것 자체도 문제지만, 검찰은 2009년 2월24일 이 전 대법원장에 대해 사찰이 진행됐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해 사찰 배경을 둘러싼 논란은 더 커지고 있다.
대법원은 이 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이 있었다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이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하는 행위이고, 법치국가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이 있었던 전날인 2009년 2월23일 언론을 통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파문이 일었던 점을 근거로, 지원관실이 신 대법관에 대한 이 전 대법원장의 심중을 알아보기 위해 사찰에 나섰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향파악 대상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포함됐다. 이 회장의 경우 문건에 사찰 일시도 기록돼 있지 않아 사찰의 세부적인 내용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도 사찰을 받았지만 이 회장과 마찬가지로 이름만 기록돼 별다른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지원관실의 사찰 활동은 정치권 인사들에게 집중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2009년 7월 아름다운가게 운영과 관련해 동향파악했으며,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는 협박 편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사찰 대상에 올랐으나 관련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송영길 인천시장 등 현직 자치단체장과 이석현, 양승조 민주통합당 의원, 백원우 전 의원 등도 사찰 대상에 포함됐다.
또 조준웅 전 삼성비자금 사건 특별검사와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이름도 보고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현직 판사 1명도 개인 비위와 관련해 사찰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직감찰 사례의 경우 어청수 전 경찰청장(현 청와대 경호처장)이 동생이 투자한 부산 유흥주점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있어 감찰했으나 근거가 없어 종결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 대해서는 골프회동과 인사청탁 관련 정보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모강인 전 해양경찰청장은 농지법 위반 건에 대한 보고가 정리돼 있었다.
불법사찰이 확인됐지만 범죄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사처벌되지 않은 사례도 있다. 민간인 신분인 윤석만 전 포스코 사장은 2008년 12월 포스코 회장 선임과 관련한 잡음 등을 이유로 지원관실로부터 불법사찰을 당했지만, 사찰로 인한 피해는 받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돼 수사를 종결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500건을 전수 조사했지만 대다수가 적법한 감찰이었거나, 단순 동향파악 수준에 불과해 사법처리하기 어려웠다"며 "불법사찰 자체를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민간인 사찰 방지법' 제정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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