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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22> 장사익 노래의 요람 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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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22> 장사익 노래의 요람 잠실

입력
2012.06.1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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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노래가 저리 청승맞냐. 가수도 참 꾀죄죄하게 생겼구먼. 근데, 아따, 노래는 엄청 잘 하네.

무대에 오른 소리꾼 장사익(63)을 처음 봤을 때, 그랬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송년 제야 음악회에 끝 순서로 나온 그는 ‘찔레꽃’을 불렀다.

“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목놓아 울었지 / 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이, 찔레꽃 향기가 왜 슬프지? 그렇다고 밤새 목 놓아 우는 건 무슨 청승인고. 저런 노래 줄창 듣다간 팔자 오그라지겠구나. 그런데, 객석이 뒤집어졌다. 콘서트홀이 떠나갈 듯한 뜨거운 박수. 어리둥절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가 나이 마흔 여섯에 저 노래를 들고 세상에 나온 가수라는 것, 그의 노래만 들으면 환장하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강호의 숨은 고수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나더니 무림을 한방에 제패했다는 전설을 들은 것도 한참 지나서였다.

운명처럼 만난 찔레꽃

“여기서 한 20년 살았는디, 이사 간 지 15년쯤 됐시유. 그 뒤로는 처음 와보네유.”

초여름 무더운 바람이 불던 지난 8일, ‘찔레꽃’ 이야기를 찾아 서울 잠실로 갔다. 이곳 잠실아파트 5단지의 울타리에서 이 노래가 태어났다. 그는 당시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바로 옆 걸어서 5분 거리에 전통예술 상설 공연장인 서울놀이마당이 있고, 한강 둔치도 코 앞이다. 그의 노래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들이다.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2단지를 마주 보는 5단지 아파트 울타리에 붉은 장미꽃이 한창 흐드러졌다. 찔레꽃을 찾았다. 겨우 한 그루. 누렇게 시든 꽃을 달고 있었다.

“아이구, 사철나무에 치여 찔레꽃나무가 많이 말라 죽었네유. 94년 5월 어느날, 길을 걸어가는데 바람결에 좋은 향기가 날아왔시유. 장미꽃인 줄 알았는데 가서 맡아 보니 냄새가 안 나유. 찾아 보니 찔레꽃이었시유. 하얀 찔레꽃이 붉은 장미에 둘러싸여 소복하게 피어 있었지유. 보자마자 눈물이 팍 나대유. 이게 바로 나로구나, 사람살이가 꼭 이렇구나, 허구유. 그때 지가 아주 힘들게 살았시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이었지유. 한참 울고 돌아와서 노래를 만들었지유. 그 뒤로 지 인생이 바뀌었시유. 운명적으로 아다리가 된 거지유.”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곡인‘찔레꽃’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해 11월 신촌의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하고 이듬해 나온 첫 음반 ‘하늘 가는 길’에 수록했다. 알고 지내던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세상에 나가보라고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하게 된 첫 공연은 대박을 터뜨렸다. 100명 들어가는 작은 극장에 이틀간 800명이 왔다. 무명 가수의 뜨거운 노래는 무서운 속도로 입소문이 났다. 2년 뒤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단독 공연을 했다. 결과는 객석이 미어터지는 대성공. 그때 이후 한국 최고의 소리꾼으로 우뚝 섰다.

“우리나라에 노래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가장 한국적인 노래를 하는 것은 장사익이다.”

국악 평론가 윤중강의 말대로, 장사익 노래의 뿌리는 한국 전통 가락과 장단이다. 소리꾼으로 나서기 전 그는 새납쟁이(태평소 연주자)였다. 어린 시절 고향인 충남 홍성의 광천에서 동네 아저씨가 부는 태평소 소리를 좋아하던 소년은 서른 두 살에 아마추어 국악 동호회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태평소를 배웠다. 농악패의 새납쟁이로 94년 전주대사습에 나가 장원을 하는 등 여러 대회에서 상도 탔다. 남의 집 돼지들이 새끼를 낳으면 모아서 장에 내다 팔아주는 일을 하던 아버지는 장구를 잘 쳤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셌던 고향 마을의 농악은 귀에 익어 몸에 밴 상태였다.

태평소가 열어준 노랫길

가수로 세상에 나오기 전 그의 삶은 참 볼품 없는 것이었다.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열 일곱에 상경해서 선린상고를 다녔다. 3학년 2학기 때 보험회사에 취직이 돼서 시작한 사회 생활 25년 동안 직장을 열댓 번 옮겼다. 무역회사,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영업직, 독서실 주인, 카센터 사무장…. 하는 일마다 엎어지고 자빠져서 사는 게 막막하기만 했다.

1994년 1월 4일, 그는 마지막 직장이던 카센터를 그만 두고 백수가 됐다.

“나름대로 애는 쓴 거 같은데, 진짜 열심히 살아왔나 싶더라구유. 이게 아닌데, 지대로 한번 살아봐야 하는데,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새납쟁이가 돼보자 했지유. 딱 3년만 목숨 걸고 태평소를 불어보자, 그러면 밥은 먹고 살겠지 허구유.”

노래 잘 한다는 소리는 진작부터 들었다. 어린 시절 웅변을 해서 목청을 틔웠고 취직하자마자 종로의 가요학원을 3년간 다니며 제대로 배운 노래 실력은 새납쟁이 시절 음악 하는 이들과 어울린 공연 뒷풀이 자리에서 빛났다. 노래를 불렀다 하면 다들 뒤집어졌다.

“그때만 해도 태평소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었시유. 지가 오죽玖?남들이 쳐다 보지도 않는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겠시유. 돈 달라고 안 할 테니 시켜만 달라고 이광수 사물놀이패를 따라댕겼시유. 누가 빵꾸 내면 땜방 한번 해볼까 하고 죽어라고 연습했지유. 소리가 커서 새나갈까 봐 이불 뒤집어 쓰고 불고, 한강 고수부지로 나가는 토끼굴 같은 통로에서 남들 안 다니는 한겨울 밤 12시 지나서 쭈그리고 앉아 연습했시유. 그러다 보니 숨어 있던 노래가 나온 거 같어유. 처음부터 가수 되려고 달겨든 게 아녀유. 욕심 다 버리고 시작한 태평소가 노랫길을 찾아준 셈이지유.”

그가 태평소를 연습하던 굴다리로 갔다. 태평소를 꺼내며 그가 말했다.

“태평소 놓은 지 10년이 넘었시유. 이게 목소리를 잡아 먹어유. 만날 연습하다가 어느날 노래를 하려고 하니까 소리가 안 나오더라구유. 하도 힘들어서 밑창 빠지는 소리라고들 혀유. 피가 머리로 쏠려서 얼굴이 시뻘개지잖어유. 한겨울 오밤중에 여기서 이거 불면 찬 바람에 손이 시렸지유.”

그는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은 채 태평소를 불었다. 보기만 해도 처량한 모습.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던 그 시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서울놀이마당은 그의 노래의 또다른 요람이다. 백수 시절 그는 주말마다 전통예술 상설공연을 하는 이 곳의 단골이었다. 당시 이 곳은 굿, 농악, 탈춤 등 마당놀이 종목으로는 최고의 무대였다. 여기서 보고 들은 우리 가락과 장단이 그의 노래에 양분이 되었다. 동해안 별신굿의 푸너리 장단으로 풀어낸 ‘삼식이’, 상여소리가 들어간 ‘하늘 가는 길’ 등 그의 노래가 지닌 특별한 맛은 전통의 힘을 웅변한다.

“그때는 여기가 거의 유일하게 국악을 하는 곳이었시유. 제일 걸진 판이어서, 국악 좋아하는 ‘전국구 백수’들이 모이던 곳이지유. 공짜니까유. 우덜은 신문지 깔고 땡볕에 앉아서 구경했시유. 공연 끝나고 신나면 바로 앞 한강 둔치로 가서 뒷풀이도 하고. 그렇게 질펀하게 어울려 놀면서 보고 느낀 것이 지금 지가 이렇게 까불고 하는 데 도움이 된 거 같어유. 근디, 여기도 많이 변했네유. 천막 지붕도 의자도 전엔 없었는데. ”

밀양북춤으로 유명한 하보경의 춤에 새납쟁이로 합을 맞춘 것도 이곳, 서울놀이마당에서였다. 94년 가을이던가, 하옹은 차가 막혀 공연에 늦었다. 손님들은 웅성웅성하는데, 손자 하용부가 1시간째 춤을 춰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헐레벌떡 도착한 하옹은 옷도 못갈아입은 채 춤판에 섰다. 그런데 마침 새납쟁이가 없었다. 당시 서울놀이마당 상임 연출가이던 진옥섭씨가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형, 태평소 갖고 왔지요? 나가서 불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최고 명인과 함께 벌인 판놀음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영광이지유. 언제나 저기 나가서 해 보나 했으니까유. 하보경 할배 돌아가시기 1년 전, 대학로 극장에서 본 춤도 잊지 못 해유. 기운 없는 노인네를 번쩍 들어서 무대로 모시고 나오대유. 장단은 계속 나오는데 비틀비틀, 저 노인네 쓰러지면 어쩌나 싶었지유. 한 3, 4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손을 들고 어깨를 털썩, 북 한 번 뻥 치더니 뒤로 탁 넘어지는데, 그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본 거여유. 나무로 치면 곁가지 다 쳐내고 기둥만 갖고 추는 춤 말여유. 이게 답이다, 노래도 이래야 하는구나, 생각혔지유.”

딱 한 번만 무대에 서고 끝날 줄 알았던 노래 인생이 올해로 18년, 많이 유명해진 지금도 그는 자가용 없이 버스와 전철만 타고 다닌다.

“사람 냄새를 맡아야 사람 냄새 나는 노래를 할 수 있는데, 자가용을 타면 사람들 냄새를 못 맡어유. 지는 죽을 때꺼정 노래할 거여유. 죽음이 내일 모레인 아흔 살 노인네가 노래를 한다고 생각해봐유. 씽씽한 힘은 없겠지유. 살아온 이야기 읊조리듯 겨우 소리만 내겄지만, 기가 맥히지 않겄시유.”

쓰러질 듯 비틀비틀 나와서 북망산천 바라보며 인생을 돌이키는 노래를 부르는 그를 상상해본다. 그때 우리는 한세상 잘 놀다 가는 바람을 보며 더없는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 장사익 노래의 힘, 시

장사익 노래는 시다. 직접 쓰기도 하고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이기도 한다. 그는 노래를 만든다고 하지 않고 ‘엮는다’고 말한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 듯 무심한 마음에 어느 날 시가 와서 꽂히면, 노래로 엮는다. 그의 노래가 지닌 특별한 감동은 이 시에 있다.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 그의 노래 ‘희망 한 단’의 구절이다. 질문을 받은 채소 파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요? 나도 몰라요. 희망유? 채소나 한 단 사가시유, 선생님.”

희망이 별 것인가. 이 아줌마의 희망은 채소 한 단 파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희망은 소소한 거여유. 떡이 큰 걸 희망인 줄 아는데 아니에유. 지 꿈이 이뤄진 것도 제일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하다 보니 된 거여유. 처음부터 노래에 목숨 걸었으면 지금처럼 됐겄시유?”

정호승 시에 붙인‘허허바다’는 망망대해에 뜬 겨자씨 한 알 같은 인생을 노래한다.

“세상 겸손하게 살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라 하는 노래여유. 우리가 폼 잡고 크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지유. 범패도 넣고 중모리 장단도 넣어서 노래로 엮었시유. 음악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곡이지유.”

또다른 노래 ‘삼식이’는 들으면 웃음이 난다. 이렇게 시작한다.

“삼식아, 아, 삼식아, 워디 갔다 이제 오는겨. 쟤 손 좀 봐요. 새까만 게 까마귀가 보면 할아버지 허겄어. 빨리 가서 손 씻고 밥 먹어.”

이어지는 구절은 노는 데 정신 팔려 밥 때도 모르고 쏘다니는 어린 자식을 부르는 엄마의 곤경이다. 동해안 별신굿의 푸너리 장단에 실린 가사를 볼작시면, ‘어이구 죽겄네’ 소리가 절로 날 판이다. “소낙비는 내리구요 업은 애기 보채구요 허리띠는 풀렸구요 광우리는 이었구요 소코팽이 놓치구요 논의 둑은 터지구요 치마폭은 밟히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똥오줌은 마렵구요.”

그는 어릴 때 시골 들판에서 엄마소가 젖이 불면 음매음매 하고 송아지를 부르던 소리를 떠올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

“얘야, 와서 젖 먹어라, 그러는 거지유. 그 모습이 우리 엄마들 모습과 닮았시유. 엄마들 하는 일이 얼매나 많어유. 그렇게 고단하면서 우덜을 키웠시유.”

서정주 시에 붙인 ‘황혼길’은 죽음에 관한 절창이다. “새우마냥 허리 오구리고/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 나도 인제 잠이나 들까 (중략)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 엇비슥히 비기어 누워 /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죽음을 이토록 가뿐하게, 또한 장엄하게 노래한 시가 또 있을까.

시가 그에게 와서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들이 우리들 가슴에 사무친다. 시의 힘, 노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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