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부담을 열고 조심스럽게 백 냥 꿰미 세 줄을 꺼내어 지전 주인과 두 사람에게 내밀었고, 주인이 먼저 돈 꿰미를 거두자 서일수도 얼른 받아서 꿰미를 풀어서는 지전 주인의 거간료 두 사람 몫으로 사십 냥을 헤아려 내주며 말했다.
이 집에 쓰시던 행담이라도 있으면 하나 파시구려.
주인이 두리번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가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쓴 행담을 가지고 나왔다.
한 닷 냥 받아야겠지만 거저 쓰시우.
서일수가 전대에 말아서 차고 있던 것과 돈 두 꿰미를 행담에 넣고 노끈으로 둘둘 감아 질끈 동이고는 그제야 한 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행담에 헝겊 멜빵도 달렸으니 맞춤하게 짊어질 수 있을 터였다. 시골 선비는 자신이 돈을 내주고도 어쩐지 멋쩍었던지 슬며시 말을 꺼냈다.
내가 상주 사는 사람으로 본래 큰 벼슬을 한 집안은 아니지만 혈족 중에 군수 현감 지낸 어른도 계시고 생원 진사한 이도 몇이 되신다오. 이제 내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터에 평생 글을 읽었고 나이 사십에 이르도록 열 차례 가까이 과거에 응시하였건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소그려. 다행이 물려받은 전장과 선산도 있고 처첩이 낳은 아들이 그득하건만 오로지 한이 되는 바는 생원은커녕 초시도 붙지 못하였다는 게요. 영남이 원래 조선 제일의 반향이라 도처에 거유 석학이 많으니 이번에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위로는 조상님께 불효요, 아래로는 처자식과 인근 상민들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외다. 저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과거인 셈입니다.
우리가 힘써 도와드릴 테니 샌님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서일수는 그렇게 말하고 지전 주인께 물었다.
그런데 여기 참고할 만한 협서(挾書)는 준비되어 있겠지요?
있다마다요. 시부(詩賦)와 책(策)이 중점이니 족집게처럼 모아놓은 해제가 여러 권입니다.
돌아보고 이르니 점원 총각이 손때가 반질한 붓, 먹, 벼루, 종이 등의 문방사우 일습과 책자가 들어있는 싸리 행담을 내주었다. 이신통과 서일수가 행담을 열어 책을 차례로 들춰보고 내심 만족하였다. 시골 선비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놓였는지 감탄하여 말했다.
허어, 이런 과거가 다 있나.
자아, 그러면 샌님은 안에 들어가 좀 쉬십시오. 당신들은 전방에서 대충 눈 붙이며 기다렸다가 샌님 모시고 과장으로 들어가면 되오.
두 사람은 갓과 웃옷을 벗어 걸고 전방에서 모로 쓰러져 새우잠이 들었는데 시각이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판자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윗목에서 자고 있던 총각이 부스스 일어나 가게의 판자문을 밖으로 밀어내자 장정들이 쏟아져 들어섰다.
어서들 나오쇼, 거자는 어디 계시우?
그들은 길건 쓰고 포졸처럼 검정색 무릎치기 걸치고 텁석부리 수염에 인상이 사나워 보여서 한눈에도 도성의 왈짜패거리인줄 알아볼 만하였다. 물론 왈짜도 있겠지만 접꾼으로 풀려나온 젊은 것들이 수천 명이라 많은 숫자가 각 군영의 군졸들이었다. 이를테면 번이 끝난 시각에 하루 품을 내어 돈을 벌어 보자는 셈이었다. 물론 한양의 권문은 물론이요 지방의 세도가에서도 힘꼴깨나 쓰는 혈기 방장한 가노들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서일수가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니, 파루도 안 쳤는데 벌써 나간단 말이오? 그러다 순라에 걸리면 공연히 포청에 끌려가 매나 벌 텐데.
콧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장정이 껄껄 웃으며 한마디했다.
이 양반이 도무지 물정을 모르는군. 우리가 순라의 아재비쯤 되는 사람들이우.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이 깬 지전 주인이 선비를 깨워 가지고 전방으로 나왔다.
좀 이르긴 하지만 남보다 먼저 입장하려면 앞줄에 서야 되오. 잠시만 기다려주오. 동접 사람들이 올 테니.
의관 정제하고 소지품을 챙겨 기다리는데 함께 갈 다른 두 선비의 일행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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