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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에서 만난 중국 현대 100년의 얼굴] <5·끝> 견부의 삶에 새겨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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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에서 만난 중국 현대 100년의 얼굴] <5·끝> 견부의 삶에 새겨진 역사

입력
2012.06.1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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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몸으로 협곡서 배를 끌던 과거는 잠겼지만 "여기 있어 행복하다"

'북소리가 미친 듯이 울리고 징을 두드리는 사람이 밧줄을 잡은 견부들 사이를 정신 없이 오가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면서 두 시간 동안이나 사투를 벌였는데도 배가 앞으로 움직이기는커녕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나무 밧줄이 끊어지면서 배를 끌던 견부의 대열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배가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1897년 12월부터 6개월간 중국 창장(長江)을 답사한 영국 출신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묘사한 견부(縴夫)의 모습이다. 견부는 밧줄로 배를 끄는 사람이다. 물살이 거칠고 암석이 많은 창장 상류 협곡지대(長江三峽)에서는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비숍은 에서 견부에 대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고단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비숍이 견부를 목격했던 협곡지대에 속하는 후베이(湖北)성 바둥(巴東)을 찾았을 때 그가 115년 전 보았던 날카로운 바위와 거친 물결은 더 이상 없었다. 싼샤(三峽)댐 상류 92㎞ 지점에 있는 협곡은 이제 상류와 하류의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견부는 만날 수 있었다. 아이샤오진(艾孝金ㆍ58)씨는 바동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창장의 지류 센농시(神農溪)를 20분쯤 거슬러 올라간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견부였으며 그가 아는 한 조상은 모두 견부였다. 대대로 이어온 견부의 삶은 그의 시대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살면서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지도자의 얼굴이 바뀌면서 변화한 현대 중국의 모습이 그의 삶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당시 마을 관례에 따라 16세부터 견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번 일을 맡으면 상류로 25㎞ 정도 배를 끌고 올라가는데 3일이 걸렸다. 잠은 주로 배에서 자고 양식은 옥수수처럼 간단한 것을 싸가지고 다니며 먹었다.

일이야 언제나 쉽지 않았지만 장마철과 겨울철이 특히 힘들었다. 면도한 것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바위에 미끄러져 다치는 경우가 흔했고 폭우로 물살이 거세질 때는 급류에 휩쓸려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옷을 모두 벗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추위도 힘겨웠다. 그는 "젖은 옷이 물살에 감기면 일하기 어렵기 때문에 겨울에도 간단한 상의만 걸치고 하의는 입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에는 견부도 농촌의 생산대처럼 일괄적 통제를 받았다. 일을 하면 돈 대신 점수를 받았다. 점수가 쌓이면 매달 양식을 받았는데 쌀과 밀의 비율이 대략 6대1 정도였다. 그는 "먹을 게 부족해 고구마나 옥수수 등을 재배했는데 그때는 다들 배고픈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부터 점수가 아닌 돈을 받았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가 열리면서다. 관리를 벗어나 팀별로 화주를 찾아 다니며 일감을 따는 게 힘들었지만 생활은 나아졌다.

개인적인 변화도 있었다. 1981년 그는 배 위에 타서 다른 견부를 지휘하는 선장이 됐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선장을 했고 나도 남보다 빨리 선장이 됐지만 돈을 더 받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키가 160㎝ 남짓으로 부엌에서 일하는 한 살 아래 부인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검게 그을린 두툼한 팔뚝은 맨손으로 배를 끌며 잔뼈가 굵은 그의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마을에 살던 부인과 1977년 결혼해 1남 1녀를 얻었다.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이기 때문에 '한 자녀 정책'에 따른 벌금은 내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ㆍ개방이 본격화하면서 더 큰 변화의 물결이 다가왔다. 경제 발전에 따라 동력선이 많아지고 새로운 육로가 뚫리면서 견부 일감이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일감이 생겼다. 1991년 견부가 관광상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창장만의 특이한 견부 문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짐을 실은 배를 상류로 끌어올리는 '진짜 견부' 일을 하면서 동시에 관광객이 탄 배를 끄는 '관광 견부' 일도 했다. 옷도 제대로 못 걸치고 3일에 걸쳐 일해야 하는 진짜 견부보다 옷을 입고 두 시간 동안 계곡을 오가는 관광 견부가 더 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 중심은 자연히 관광 견부 쪽으로 기울었다. 물가가 오른 탓도 있지만 관광 견부 일을 병행하면서 수입도 1980년대에 비해 10배 가까이 늘었다.

변화는 삶의 터전인 강 자체에도 찾아왔다. 장쩌민(江澤民)이 집권한 뒤 1992년 싼샤댐 건설이 시작?것이다. 그의 마을도 수몰지구에 포함됐다.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등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떠나는 이들 중에는 그와 함께 견부로 일했던 두 남동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96년 보상금으로 마을 바로 위 고지대에 새 집을 짓고 남았다. 그의 마을을 오가는 동안 푸른 물과 산을 배경으로 반듯반듯한 흰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이런 그림 같은 풍경은 모두 이때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물이 차올랐다. 2003년 싼샤댐 저수를 시작하면서 가늘게 이어지던 '진짜 견부'의 삶도 수면 아래로 함께 사라졌다. 수심이 평균 60~70m로 높아지면서 며칠에 걸쳐 배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 급류와 계곡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부 체험 관광은 상류 강가에서 계속됐다.

왕년의 선장 견부도 이제 관광 견부로만 남았다. 하지만 '힘을 쓸 수 있을 때까지'인 견부의 정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50대 중반을 넘긴 그는 지금도 한 달에 여덟번 정도 관광객이 탄 배를 끄는 견부가 된다. 아쉬울까. "재미야 옛날이 더 있었지만 생활은 지금이 훨씬 좋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점심식사 때가 다가오자 마을 아래 강가로 내려가 미리 쳐둔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갖고 올라왔다. 그는 깊은 주름을 그리고 웃으며 "물이 깊어진 후 물고기가 더 많이 잡힌다"고 말했다. 그의 발길은 한번도 바둥을 벗어난 적이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없다. 그는 "그냥 여기에 있는 게 행복하다"며 "지도자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서 내 삶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인이, 방금 잡아 올린 물고기로 만든 찌개와, 돼지고기와 고추를 볶은 투자족의 전통 음식을 점심으로 내왔다. 아마 세월이 변해도 이 맛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바둥=류호성기자 rhs@hk.co.kr

■ 치수의 열망이 빚은 싼샤댐… 1917년 쑨원이 첫 제안

'현대의 만리장성' 싼샤댐에는 중국 현대 지도자들의 염원이 집약돼있다. 창장과 황허(黃河)를 젖줄 삼아 발달해온 중국에서는 예부터 국가 지도자의 중요 임무 중 하나가 치수였고 그 사실은 현대에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쑨원(孫文)은 싼샤댐 건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1894년 당시 청의 실세였던 이홍장(李鴻章)에게 치수를 위해 수력 발전을 권고하는 글을 올렸고 1917년에는 구체적으로 싼샤댐 건설을 제안했다.

1954년 창장에 대홍수가 발생해 중류 우한(武漢) 등에 큰 피해가 발생하자 대형 댐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마오쩌둥이 1956년 우한을 찾아 '싼샤댐이 만들어지면 전세계가 깜짝 놀랄 것'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의 시대에는 재원과 기술 모두 역부족이었다.

싼샤댐 건설 가능성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것은 덩샤오핑이 1980년 충칭(重慶)에서 현재 댐이 들어선 이창(宜昌)시 싼더우핑(三斗坪)까지 답사에 나서면서부터다. 이후 댐 건설에 대한 기술적 검토가 본격화했다. 장쩌민 역시 1989년 당총서기에 오르자마자 싼더우핑을 방문했다. 그리고 1992년 4월 3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싼샤댐 건설안이 통과됐다. 1994년 첫 삽을 뜬 싼샤댐 건설은 후진타오(胡錦濤) 체제가 들어선 2006년 완공됐다.

홍수 조절, 물류비용 감소, 전력 생산량 증대 등 싼샤댐이 가져온 혜택에도 불구하고 우려 또한 만만치 않다. 싼샤댐은 건설 추진 때부터 140만명에 이르는 이주민과 수백 곳의 유적 수몰 때문에 논란이 됐었다. 지질과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우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8년 쓰촨(四川)성 대지진 때는 싼샤댐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며 지난해 창장 중하류 지역에 닥친 50년 만의 가뭄 때도 싼샤댐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싼샤댐이 중국 현대 지도자들의 업적으로 기록될지 과오로 기록될지는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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