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념의 격랑을 오히려 기회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기틀을 잡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대군을 이끌고 창장(長江) 도하 작전에 성공해 난징(南京)을 점령한 1949년 4월. 당시 장쩌민(江澤民)은 국민당군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였던 창장 하류 최대 도시 상하이(上海)에서 첫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1913년 미국인이 설립한 상하이 최대의 식품회사 하이닝(海寧)식품이었다.
그 시절 장쩌민의 모습은 상하이에 있는 이민(益民)식품 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민식품은 난징을 손에 넣은 지 한달 만에 상하이를 점령한 공산당이 하이닝식품을 접수하고 바꾼 이름이다. 기념관에 붙어있는 대학 졸업 사진 속 앳된 얼굴의 장쩌민은 그때도 특유의 두꺼운 검정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1948년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 전기과를 졸업한 장쩌민은 교수의 추천으로 하이닝식품에 취직했다. 당시 하이닝식품의 주력 상품은 상하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스크림인 메이뉘(美女)바였는데 장쩌민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냉동설비에 안전하게 전력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기념관에서는 장쩌민이 직접 고쳤다는 발전설비와 그가 손으로 쓴 야근일지도 볼 수 있다.
장쩌민이 취직한 후 미국인 소유주로부터 하이닝식품을 사들인 국민당 정권은 공장에서 국민당군의 보급품을 생산하도록 했다. 그러니 엄밀하게 따지면 당시의 장쩌민은 국민당을 위해 일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대학시절 공산당에 가입한 비밀당원이었다. 로버트 로렌스 쿤이 쓴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 시절 장쩌민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잘 사귀어둬야 하지만 신념은 드러내지 말라"고 권했다.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은 공산당이었고 장쩌민은 당원 신분을 드러낸다. 공산당 치하에서 승승장구한 장쩌민은 곧 이민식품의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메이뉘바 대신 새 시대와 어울리는 이름의 광밍(光明)바를 생산한다. 어떻게 보면 타협적이고 다르게 보면 이중적인 이런 태도는 장쩌민이 역사의 급류에 떠내려가지 않고 중국 최고지도자에 오른 비결이기도 했다.
지난달 23일 상하이인민정부 청사 앞을 지키는 경찰은 가슴을 한껏 내밀고 정면의 인민광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있는 것이라곤 비 내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상하이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뿐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1989년 5월에는 시위로 들끓는 장소였다.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광장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호응해 상하이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기술관료로 문화대혁명 때도 큰 상처를 입지 않고 경력을 이어가던 장쩌민은 당시 상하이의 최고 책임자인 당서기였다. 63세의 장쩌민은 은퇴를 준비하며 모교인 상하이자오퉁대 교수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중국을 뒤흔든 시위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달리 장쩌민에게는 기회가 됐다. 그는 시위대와 협상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실제로는 인민광장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학생들과 대화했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시위대의 애국심을 칭찬하며 공동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논의를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병원을 찾아 입원한 학생들을 위로해 유혈사태 없이 시위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당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이, 사태 해결에 골몰하던 덩샤오핑 등 원로들의 눈에 들었고 장쩌민은 당총서기로 전격 발탁됐다.
장쩌민이 최고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그의 장수를 예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이나 덩샤오핑과 달랐다. 상하이 푸단(複旦)대에서 만난 판종치(潘忠岐) 교수는 "전임자들이 권력을 스스로 쟁취한 반면, 장쩌민의 권력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없는 지도자' 장쩌민은 특유의 타협적인 태도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는 사회주의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천윈(陳雲) 등 보수 원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덩샤오핑의 개혁ㆍ개방을 착실히 계승했다. 그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현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현기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판 교수는 "그는 기술관료로 정치노선 경쟁과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상하이에 머물며 베이징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며 장쩌민이 권력을 잡은 또 다른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에 오른 장쩌민은 스스로 권력 투쟁의 주인공이 됐다. 장쩌민은 주룽지(朱鎔基), 쩡칭훙(曾慶紅), 우방궈(吳邦國) 등 자신의 상하이 인맥을 베이징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했다. '상하이방'의 등장이다.
장쩌민은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권력을 넘길 때도 타협적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국가주석 자리를 내줬지만 무력을 장악할 수 있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2년간 더 유지했으며 중국 최고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5명을 자신의 인맥으로 채웠다.
그리고 권력을 넘긴 지 10년이 지난 올해 86세의 장쩌민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10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4세대 권력은 시진핑(習近平) 을 위시한 5세대로 교체된다. 이를 앞두고 중국 지도부는 권력투쟁이 한창이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보시라이(薄熙來) 사건도 이 와중에 터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장쩌민으로 대표되는 상하이방 및 태자당의 연합세력과, 후진타오가 이끄는 공청단(共靑團)의 상무위원 진입 비율을 놓고 다양한 예측이 오간다. 이번에는 장쩌민이 어떤 타협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상하이=류호성기자 rhs@hk.co.kr
■ "장쩌민이 선배라는 것 알지만 정보도 부족하고 관심도 별로"
상하이자오퉁대 교정의 한 카페에서 만난 주언지아(朱恩佳ㆍ20)양은 장쩌민처럼 두꺼운 검정테 안경을 쓰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영어책, 노트북 컴퓨터, 오렌지주스 잔이 놓여있었다. 상하이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중국의 신세대 '주링허우(90後ㆍ1990년대 출생자)'다. 대부분의 또래처럼 그도 중국의 '한 자녀 정책'에 따라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주양의 집에 자동차는 없지만 피아노는 있다. 그는 네살 때부터 10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엄마가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치고 싶었는데 배우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대신 나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줬는데 재미도 있고 잘 쳐서 오래 했다"고 말했다. 주양은 고중학교(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열네살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 두고 공부에 집중했다.
중국의 10대 명문대학에 꼽히는 상하이자오퉁대에 입학한 그는 공부도 잘했다. 상하이 명문 난양모판(南洋模範)고중에 다닐 때도 그는 반에서 5등 이내의 성적을 유지했다. 수학만 학원을 따로 다녔는데 학원비는 1주일에 두 시간씩 100위안(약 1만8,000원)이었다. 대학 입학 후에는 아르바이트로 과외 교사와 패스트푸드점 점원으로 일해봤다고 했다. 과외 교사로는 2시간에 70~100위안을 받았고 점원으로 일할 때 시급은 8.8위안이었다.
주양은 대학 전공으로 방송영화를 택했다. 그는 "피아노 외에 미술, 무용 등을 배워 예술적인 것에 관심이 많으며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자주 봤다"며 "소학교(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과 함께 영화 '타이타닉'을 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영화를 즐겨 본다는 그는 한국의 최근 영화로는 '써니'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자란 것처럼 보이는 주양은 자신이 부잣집 딸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은 모두 평범한 회사원으로 월급은 각각 4,000위안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5,450달러(약 3만4,700위안)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집도 방이 두 개가 있으니 작은 편이다. 물론 하나는 그의 몫이다. 그는 "요즘 부잣집 아이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 간다"며 "미국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고, 졸업 후에는 홍콩에서 공부를 더하고 싶다"고 했다.
주양은 "부모님은 덩샤오핑을 고맙게 생각하는데 나는 부모님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현대 지도자들에 대해 "장쩌민이 대학 선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치인들을 평가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며 "책도 읽고 더 알아야 얘기할 수 있을 텐데 다른 공부할 게 많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상하이=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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