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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순화원과 대화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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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순화원과 대화숙

입력
2012.06.1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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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순화원 갈 놈'이라는 욕이 있었다.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이 도입됨에 따라 전통 문화요소 전반이 그에 맞춰 변형되거나 소멸했던 바, 욕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욕은 '염병할 놈'의 근대적 변형판이었다. 순화원은 1911년에 일제가 세운 전염병 전문병원이었는데, 지금의 서울 옥인동에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의료인도 부족했던 데다가 콜레라나 장티푸스 등의 급성 전염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도 없었기 때문에, 말이 전문병원이지 그저 격리 수용 시설에 불과했다. 일단 순화원에 들어가면 살아 나오는 경우보다 죽어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연히 환자들은 이 병원에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염병이 돌 때마다 병원은 만원이었다.

총독부는 전염병 의심 환자가 발생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게 했지만 순화원에 가면 십중팔구 죽는다는 걸 알면서 부모 자식을 보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식구들의 보살핌 아래에서 죽게 하는 것이 가족 된 도리였다. 사람들은 환자가 발생해도 발병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일제 경찰은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전염병이 돌면 그들은 가가호호 다니면서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를 적발해 순화원에 보냈다. 물론 그들에게는 질병을 진단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혀 조선인을 '병균'처럼 대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전염병이 돌 때에는 감기에 걸리는 것도 위험했다. 심하지 않은 발열 증상 때문에 순화원에 끌려가 진짜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받은 의료 인력이 늘어나고 치료제가 보급되면서 순화원의 비인도적 참상은 점차 개선되었고, 환자가 아님에도 환자로 오인 받아 끌려가는 사례도 줄었지만, 대신에 다른 '질병'과 격리 수용소가 애꿎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25년 일제는 '국체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자들의 조직과 선전 활동을 범죄로 규정한 '치안유지법'을 공포했다. 이 때부터 '사상범'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으나 권력이 집중될수록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영역도 넓어지기 마련이다.

35년 조선총독부는 '국체 명징에 관한 훈령'을 발했다. 천황제를 부정하는 자뿐 아니라 덴노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나아가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 전부를 '사상범'으로 취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로써 평화주의자나 민주주의자도 사상범이 되었다. 일제는 국체에 대한 관념, 즉 국가관을 명확히 하기 위해 덴노가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 일본의 신을 섬기는 신사참배, 덴노의 신민(臣民)으로 살 것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의 서사 낭송 등을 강요했다. 그들은 '건전한 국가관'은 국가와 국민 사이의 '건전한 관계'가 아니라 반복적인 암기와 복창, 강요된 경배에 의해 함양된다고 믿었다.

이듬해 총독부는 다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했다. 일본 경찰에 의해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사상범 보호관찰소'에 입소해 '치료'를 받고 다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가입하여 상시 관찰을 받아야 했다. 이 연맹은 얼마 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되었는데, '일본 정신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일제 권력은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생각을 모두 머릿속의 '병균'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불온사상'에 감염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격리했다. 그러나 콜레라균이나 장티푸스균과는 달리 '불온사상균'은 눈으로 볼 수도, 시약으로 검출할 수도 없었다. 진단과 치료 모두 고전적인 방법에 의존해야 했다. 중세 유럽에서 '악마 숭배자'를 판정할 때 썼던 바로 그 방법. 그러나 고문은 의심받은 자의 결백을 확실히 입증하지도, 의심한 자의 의심을 석연히 풀어주지도 못했다. 아무리 전향서를 쓰고 덴노에 대한 충성을 재삼재사 맹세해도, 일제 권력은 그들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더구나 남의 '사상'을 검증할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의 판정 기준은 '자기 사상'이었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 모두를 '불온사상'이라고 의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괴롭힌 것은, 불온사상이 아니라 누군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심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면서 사회 전체가 의심의 눈길에 사로잡혔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 모두가 억압되었다. 근거가 있든 없든,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의심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의심의 전염 속도는 그 어떤 전염병보다도 빠르다. 그렇기에 '사상검증'이라는 명목의 '의심'은 사상의 자유를 넘어 인간의 자유 자체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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