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외국에서 건축가들이 오면 우리 고건축을 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안내를 맡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수사가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집의 영역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잡아서 얘기해야 할지, 정원의 영역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한정해야 할지, 그 기준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 식대로 집이나 정원의 영역을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 할 수도 없다. 정확히 나누어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난감함은 서양인에게 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건축물 앞에 데려가면 그들은 건축물 자체만 본다. 나로서는 답답하다. 방과 툇마루와 기단과 마당과 동네와 사산으로 확장되는 우리 집의 원리가 그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얘기한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정원에 데리고 가면, 묻는다. "정원은 어디에 있나요?" 바로 당신이 밟고 있는 거기가 정원이라고 얘기하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하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우리의 주거문화는 이질적이다. 제법 동양이라는 문화에 대해 이해가 넓은 이방인들도 한국의 전통에 대해서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온돌이라는 난방방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없는 것이며, 집의 기능과 상관없이 주변의 자연을 상징적으로 차용하는 방식도 희귀한 것이다. 한 방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으며, 공부도 하고, 손님도 맞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놀이도 하는 광경은 희한하기까지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집에는 경계가 없다. 기능적으로는 무한하고, 상징적으로는 하나의 우주다. 어떤 기능이든지 끝없이 수용 가능한 집의 형식과, 우리의 앉는 자세인 책상다리는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한자문명권의 가장 중요한 세 나라 중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생활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은 '정좌' 한다. 정좌란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를 말한다. 정좌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을 당시의 습관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정좌의 습관이 지켜지고, 중국은 인도의 풍습을 받아 들여, 송나라 때부터 의자 생활을 하면서, 이 정좌의 풍습이 사라졌다. 한국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이 고려 때 중국의 영향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의자생활을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다시 책상다리로 돌아간다. 책상다리 자세로 앉는다는 것은 바지를 입었다는 것이고, 바지를 입었다는 것은 말을 타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좌는 항상 벌이다. 지금 우리는 의자생활에 익숙하지만, 의자 위에서까지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말을 타던 사람들이 정착 농경민처럼 집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늘 정착하던 사람들의 집과 같을 리가 없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집을 말등에 얹고 다닌다. 초원의 사람들의 집의 형태인 '게르'가 그 좋은 예다. 게르는 펼칠 수 있는 목구조가 있고, 그 위에 짐승의 가죽을 두르면서 집이 완성된다. 게르 안에는 칸막이가 없다. 안방도 없고, 건넌방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경계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초원의 유목민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지킨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은 여성들의 공간이고, 오른쪽은 남성들의 공간이며, 가운데는 신주가 놓인다. 불교의 영향으로 과거에는 불상들이 주로 놓였지만, 사회주의와 소비에트의 식민지를 겪으며 요새는 씨름 선수들의 사진들이 주로 놓여 있다.(멀지 않은 과거, 바로 그 위치에 우리는 가족사진들을 액자에 걸어 두었다.) 손님들은 항상 여성의 공간을 피해 오른쪽 남성의 공간에 앉아야 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정해지고 나면 기능은 혼재된다. 원형으로 두른 한 공간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이야기도 하며, 차도 마신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게르의 왼쪽은 안채요, 오른쪽은 사랑채가 된다. 그리고 가운데는 대청이 된다. 그리고 원형의 가운데는 마당이 된다. 말을 타던 사람들이 집을 가지면서 칸막이를 하며 진화한 주거 형식이 조선집이다. 우리가 한 공간에서 다양한 기능을 소화 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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