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 이 오랫동안 고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 사랑과 복수이야기의 애절함도 있지만, 배경이 된 광막한 자연환경도 한몫 하고 있다. 우리말로 황무지라 번역된 'Moorland'가 바로 그것이다. 황무지라고 하면 흔히 먼지가 풀풀 나고 건조한 사막 비슷한 경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황무지는 사실은 작은 관목들이 자라는 지역이고 이 중 상당 부분은 이탄습지(Peatland)라 부르는 생태계로 구성되어 있다. 폭풍의>
이탄습지는 북유럽, 시베리아, 캐나다와 미국 중북부 등에 널리 분포하는 독특한 습지 생태계이다. 보통 습지는 호수나 강가에 많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 습지는 평지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는 '스패그넘'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이끼나 작은 관목과 풀들이 자라는데 영양분도 부족한 곳이라 식물이 자라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 그렇지만 물에 고여 있고 날씨가 서늘해서 식물이 죽어도 쉽게 썩지를 않는다. 또 필자가 참여한 연구진은 이탄습지에 축적되는 페놀릭이라는 물질이 분해 속도를 더욱 늦춘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썩지 않은 식물 사체들이 땅속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씩 짙은 밤색으로 쌓인 물질을 '이탄'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라 이런 이탄습지는 오랫동안 아무 쓸모 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탄을 캐서 연료로 사용하기도 했고, 물을 빼고 농경지로 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탄습지의 중요성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만 식물이 죽어도 분해 되지 않아 이탄으로 쌓이니, 전 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장기간에 걸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먹다 남은 두부를 물에 담가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춥고 산소 공급이 부족해서 미생물이 분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저장되어 있는 탄소의 양이 500 기가 톤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대기 중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의 총량이 760 기가 톤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양의 탄소가 이탄습지에 잡혀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기후변화 모델의 예측에 따르면 이탄습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고위도 지방의 온도가 특히 많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더운데도 불구하고 열대지방에도 이탄이 존재하는데 이런 곳은 더욱 가물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물에 담가서 냉장고에 보관했던 두부를 밖으로 꺼내서 물을 따라 버리면 금방 썩어 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탄습지에 보관되어 있던 유기물들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면서 이산화탄소나 메탄과 같은 온난화 기체가 더 많이 발생되어 기후변화를 더욱 가속화 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도 않는 툰드라 지방이나 유럽의 외딴 이탄습지에서 과학자들이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필자도 우리나라의 용늪이나 무제치늪과 같이 산 위에 존재하는 이탄습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탄습지에서 유기물의 분해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이용해서 기후변화 속도를 늦추는 공학적인 기술 개발을 시도하고도 있다. 예를 들어 탄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쉽게 분해가 되어버리는 물질들을 이탄습지에 묻어 보관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생태계 안에 가능한 많은 양의 탄소를 저장해 두는 것이 기후변화의 주범인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 에서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그러했듯이 오랫동안 버려진 땅으로 여겨진 이탄습지가 기후변화를 더욱 악화시키는 복수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새로운 기술 개발의 장소가 될 지는 결국 과학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폭풍의>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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